아버지의 채송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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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채송화
  • 조성순 수필가, 시인
  • 승인 2021.06.17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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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이리 나와서 여기 채송화 나오는 것 좀 봐라!”

오랜만에 햇살 있는 아침을 함께 보내고 있는 아버지께서 부르신다.

“에게! 이게 채송화야?”

고물고물 개미 떼처럼 기어 나오는 걸 보고 하시는 말씀이다. 저게 언제 제 모습을 드러내나 했더니 저녁때가 되어 들여다보니 콩나물 대가리만큼 커져 있었다.

5년 전에 이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혼자되어 오빠네와 계시던 아버지와 이제 다시 아버지의 딸로만 살겠다고 돌아온 나의 새로운 공간이다. 겨울이라 좀 삭막한 느낌이 들어 돈을 좀 들여서 늘 푸른 화분을 몇 개 사다 놓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눈길을 제대로 주지 못해서 그랬는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고 그랬는지 누렇게 앓기도 했지만 그런대로 싱그러움을 느끼던 참이었다.

어느 날 퇴근을 하니 커다란 화분은 온데간데없고 손바닥만 한 화분이 열 개도 넘게 베란다 높은 창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무가 시원찮아서 없애 버리셨단다. 세상에! 돈을 쏟아 버리시다니….

그때부터 아버지는 베란다에서 꼬마 화분들을 들여다보셨다. ‘몇 월 며칠 파종’ 이라는 이름표를 달아 물도 주고 햇빛 따라 비뚤어지는 자세도 교정해 주었다.

그 여름 우리 베란다에서는 채송화가 연속해서 피고 졌다. 아버지의 무료한 일상은 집 밖으로 나갔다. 집 앞 거리에 화단이 생기자 봉숭아를 심으셨다. 벌써 2년째다. 아버지는 늘 산에 다니셨다. 휴일이면 나도 산에 갔다.

내려오시는 아버지와 올라가는 나는 산 중턱에서 만나곤 했다. 어느 날엔 함께 내려오다가 화단에 봉숭아가 줄지어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아~ 봉숭아다! 내가 반기자 아버진 빙그레 웃으시며 “내가 심었다”며 흐뭇해하셨다. 그 길을 오갈 때마다 배롱나무 아래 핀 봉숭아가 날 마중 나온 아버지 같아 반가웠다.

아버지 눈에 내가 고물고물하던 때, 우리는 도롯가에 살던 집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마당 한쪽에 향나무와 포도, 앵두, 분꽃 등 아름다운 화단이 있었다. 세숫대야 크기의 돌 어항이 묻혀 있어 금붕어 두어 마리가 살기도 했다. 그 화단도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고추와 토마토로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파헤쳐졌던 화단의 흙이 상처에 앉았던 딱지가 벗겨진 새 살처럼 빨갛게 부풀어 있었고 옮겨 심은 고추 모는 아직 고개도 들지 못하고 수줍어했다. 나는 사라진 금붕어 때문에 발을 구르며 울었다. 아버지는 금붕어가 죽어서 어항을 치우다 보니 나무를 파내게 되었다고 했다.

그때도 화단 둘레엔 채송화 천지였다. 아버지는 올해 일흔넷이 되셨다. 지병이 있어 해마다 같은 시기에 두 차례 입원하신 적이 있었다. 공교롭게 채송화 씨를 뿌리고 나서였다. 병원에서 아침이면 전화로 잠을 깨워 주시곤 했다. 전화를 받으면 제일 먼저 하시는 말씀이 채송화에 물 주고 출근해라였다. 퇴근길에 병원에 들르면 아직 채송화 안 폈냐고 물으시며 베란다의 꼬마 화분들을 궁금해하셨다.

제일 먼저 꽃이 피는 화분을 병원으로 갖다 드린다고 하니까 여긴 햇빛이 별로 안으니 그냥 두라 하셨다. 동쪽을 보고 있는 아파트 베란다가 병원 창가보다 별반 나을 것 같지도 않은데 거기가 그들의 집이라 여기신 모양이었다.

그여름 아버지가 입원해 계시는 한 달 동안 나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베란다에서 채송화를 들여다봐야 했다. 그 다음 해에도 똑같은 시기에 다시 입원을 하셔서 우리는 아버지를 걱정하고 아버지는 채송화를 염려하셨다.

오늘 모처럼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하루를 보내고 있다. 오후가 되어 산책을 다녀오신 아버지는 베란다에서 콩나물 대가리만큼 올라온 채송화를 쳐다보신다. 나무젓가락으로 김도 매고 누레진 잎사귀도 따내며….

아직 채송화는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머잖아 올망졸망한 꽃들이 활짝 피겠지. 올해는 이 베란다에서 아버지와 더불어 채송화가 피고 지는 것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아버지! 올해는 절대로 채송화에 물 안 줄 거니까 아버지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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