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강하면 부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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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강하면 부러진다
  • 박재훈 목사, 포항강변교회
  • 승인 2021.06.17 11: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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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 이스라엘의 남쪽 유다왕국 19대 왕은 ‘여호야긴’(B.C.597년)이다. 그는 선왕인 ‘여호야김’을 이어 18(또는 8)세 때 왕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왕의 수명은 100일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천하가 100일로 막을 내린 원인은 나이가 어린 탓도 있었다.

아마도 그를 보필하는 참모(비서)들에 의해 그 당시 정치 상황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모든 국정의 총책임자다. 비록 나이 탓을 하고 참모들의 영향이라고 애둘러 변명을 해 보지만 역사는 그렇게 호락하게 평가만은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왕의 탓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성경은 ‘여호야긴’ 왕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석 달 열흘 동안 다스리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악을 행했다’는 표현은 하나님 반대편에 서서 사람의 힘으로 문제를 풀어가려고 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여호야긴 왕은 힘의 논리에 편승하여 국민과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강경주의 정책을 펼쳤다.

순리 아닌 사람의 힘으로 밀어 부쳐

즉 순리(여호와의 지시)대로 하지 않고 매사에 사람의 힘으로 밀어 붙이려고 했다.

실제로 그 당시 남쪽 유다의 정치 상황은 강대국이었던 애굽과 협력관계에 있었다. 친애굽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예레미야 선지자를 비롯한 그 당시 영적 지도자들은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바벨론과 협력하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다. 그러나 여호야긴 왕은 친애굽주의 정책을 버리지 않았고 고집스럽게 집착했다. 오히려 친바벨론주의자들을 배척하고 위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함락시켜 버렸다.

여호야긴 왕은 패전국이 되고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면서 여호야긴 왕의 100일 천하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힘’의 논리는 매력이 있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힘’을 가지려 안달한다.

그러다 힘을 가지고 나면 그 힘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거나 이루기 위해 발버둥 친다.

권력의 힘이든 돈의 힘이든 어떤 힘이든 힘을 가진 사람은 군림하고 지배하려고 한다. 하지만 ‘힘의 논리’만 믿고 행동한다면 반드시 부러지거나 망한다. 힘의 논리로는 사람의 마음도 세상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다.

‘힘’이란 영원하지 않은 것

‘힘’이란 영원하지 못하다. ‘힘’이란 돌고 돈다. 솔로몬의 말대로 ‘해 아래 새것(새로운)’은 없다. 힘을 가졌을 때, 힘이 있을 때 겸손해야 한다.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처리해 보겠다는 어리석음은 범치 말아야 한다.

‘힘’은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하고 도와주는데 사용해야 한다. ‘힘’을 가지고 사람을 향해 장난을 치거나 이용하는 것은 금물이다. ‘힘’이 있든 없든, ‘힘’을 가졌던 가지지 못했든 사람 소중하게 여기고 ‘네 편’ ‘내 편’을 가르지 말아야 한다.

힘으로 밀어 붙인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다르게 말하면 ‘강하게 밀어 붙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힘이면 다 된다’는 괴변을 몸소 실천하려고 한다.

옛 어른들이 하는 말 중 ‘강하면 부러진다’는 말이 있다. 강하게 밀어 붙이는 사람들에게 던져주는 경고의 말이다. 부러지지 않으려면 ‘힘 빼라’는 메시지다.

지금 우리 정치는 온통 ‘힘’ 싸움판이다. 마치 천하장사 씨름대회 풍경을 보는 것 같다.

진보, 보수, 좌파, 우파, 광화문, 서초동 등 사사건건 힘 자랑을 하고 있다.

심지어 국정 감사 자리에도 힘의 논리는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잡아먹느냐 잡혀 먹히느냐의  논리만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말 한 마디 조차도 그냥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한 마디로 상대방을 초토화시킬 작정을 하고 있다. 오직 강경 일변도다. 죽기 살기식이다.

이들을 바라보는 관중 또는 관객은 ‘국민’이다. 나도 관중이고 관객이다. 그래서 이들의 힘 싸움을 보는 것이 식상하다.

뭔가 좀 새로운 것은 없을까? 세상에는 ‘강한’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약한’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중간’이 있어 숨을 쉴 수 있다.

힘 자랑하고 힘 싸움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째서 ‘중간’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왜 ‘중도’의 길을 선택할 용기는 가지지 못하는 것일까?

강함도 약함도 아닌 ‘중간’도 존재

가끔은 국민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방법 중 ‘중도·중간’도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는 것일까?

강하면 부러진다. 세상에는 강한 것만 살아남지 않는다. 아무리 약육강식의 논리가 설득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사는 세상에는 양면이 있고 중간도 있다.

힘을 가진 것이 강하게 보이고 그 강함이 일시적 매력을 줄지는 몰라도 결코 약한 것을 이길 수 없고 중간 것을 이길 수 없다. 강한 만큼 부러지는 것도 쉽고 빠르게 찾아오는 법이다.

중간, 중도의 길은 부끄러운 것도 실패한 것도 아니다. 주관이 없는 것도 아니다.

힘이 있어도 절제하고 힘을 가지고서도 힘자랑 힘 싸움을 하지 않을 뿐이다.

이쪽저쪽을 아우를 수 있는 사람, 품을 수 있는 능력이 진정한 ‘힘’이다.

우리에게는 강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품고 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다.

남쪽 유다의 여호야긴 왕은 스스로 강하다고 고집하다가 망하고 말았다.

‘힘’있는 그들은 아직도 ‘권불십년’(權不十年)과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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