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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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24)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1.06.2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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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읍 도래밤티와 중봉의 흔적
유상지석(遊賞之石)
유상지석(遊賞之石)

세상을 떨치고 도래밤티(현 용촌리)로 들어온 조헌 선생은 과연 안빈낙도의 삶을 찾으려 했을까. 도래밤티에 안거한 그는 한동안 후율정사를 찾아오는 선비들과 학문을 토론하고 밭에 나가서 종이 하는 일도 거들며 한가로이 지냈다.

용촌리 주민이 중봉 선생이 살던 집터라고 가리키는 곳은 마을 끝 능선 밑에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큰길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마을 입구에 선생이 마시던 우물이 있다. 잘 정비된 샘가에는 그 내력을 간략히 적은 작은 유래비가 서 있다, 지금도 일정한 수위로 맑은 물이 끊임없이 나온다는 중봉 샘물은 여전히 선생의 청빈하고 강직한 삶과 같이 투명하고 맑기만 하다.

우물에서 작은 도랑 건너에 선생이 천기를 본 관천석이 있고 ‘중봉선생유상지석’이란 작은 비가 서 있다. 인봉 전승업 유고에 “정사 가까운 곳에 기이한 바위가 있는데 대체로 3~4인이 앉을 수 있는 바위였다. 중봉 선생과 더불어 술도 마시고 시도 읊으면서 국사에 대하여 슬퍼하고 분하게 여기며 눈물을 흘렸고 밤에는 천문을 보고 왜구가 군사를 움직이는 징후를 관찰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유서 깊은 유적이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서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고 어느 무심한 주민이 유상지석에 바짝 붙여서 2층 집을 짓는 바람에 가까이 가지 않으면 그 존재를 찾을 수도 없게 되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조헌 선생이 옥천 도래밤티에 정착하면서 여러 문인과 제자들이 선생의 곁에 있었으나 그중 가장 가까이서 도운 사람을 꼽으라면 역시 인봉 전승업이 아닐까 싶다. 송정 팽령의 손자요, 쌍암 엽의 아들로 1547년(명종 2년)에 태어났다. 명민하고 티없이 순수했으며 충효와 문학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전승업은 조헌이 금산전투에서 순절할 때까지 곁을 지켰다.

중봉 선생은 여기 도래밤티에 후율정사를 짓고 문인들과 학문을 토론하고 시국을 논하면서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각신리(현 이평리)를 왕래하며 후학을 양성하였으니 2020년 12월 28일 보물 제2107호로 지정된 이지당이 조헌 선생이 강학하던 서당이다. 본래는 선생이 ‘각신서당’이란 친필 현판을 내걸었는데 후대에 이르러 서당을 개축하면서 우암 송시열이 선생을 존숭하는 뜻에서 ‘이지당’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는 ‘산이 높으면 우러르지 않을 수 없다’는 ‘고산앙지’와 ‘큰 행실은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경행행지’에서 나온 것이다. 서당 입구 산비탈에 큰 바위가 걸쳐 있는데 여기에 ‘중봉조선생유상지소’라는 글귀가 음각되어 있다. 이 또한 우암 선생이 남긴 것이다.

중봉 선생은 이곳의 뛰어난 경치를 아주 좋아해서 선비들과 자주 어울렸다. 선생이 지은 율원구곡가에 제3곡이 바로 이곳 각신서당 주변의 경치를 읊은 것이다.

인봉유고에 “자주 동지들과 같이 중봉 선생을 따라 서정천 위에서 유람하며 그곳의 절경에 취하여 배회하고 소요하면서 매양 술잔을 들어 마시다가 술자리가 끝나기도 전에 국사를 근심하고 분하게 여기시어 서로 권면해서 정성을 다하여 상소를 올려 주상이 듣도록 하였고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다.”는 기록에서도 이곳의 뛰어난 경치를 선생이 매우 좋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곳 도래밤티(용촌리)는 선생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을 도모한 곳으로 그가 생전에 행한 중요한 업적의 대부분은 여기서 사시는 동안에 이루어졌다. 공주제독관에 기용되고 임진왜란에 대비하라는 수많은 상소를 올린 곳도 여기요, 함경도 길주로 유배를 다녀오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서 순절하실 때까지의 역사적인 사건들은 모두 이곳에서 은거하는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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