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1)
상태바
‘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1)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6.24 11: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학생에 뽑혔으니 약속대로 오늘부로 너는 테니스부원이다.”

정말 기뻤다.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를 이루어 가는 기쁨이었다. 비록 테니스부에 실력이 아닌 보결로 들어갔지만, 언니와의 약속을 지킨 것만으로 충분했다.

다만, 80명이 넘는 지원자 중에서 선발된 13명은 나보다 키도 크고 체격도 훨씬 좋았다. 그 당시 내 키가 134cm, 몸무게 26kg이었다. 그 작은 체구의 내가 테니스 선수를 하겠다고 나섰으니 체육 선생님이 기가 막혀 말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체격이 작으니 힘도 없어 라켓을 제어하기도 힘에 겨웠다. 하지만 테니스가 재미있었다. 외부에서 테니스 하러 오는 공군 아저씨들이 나만 보면 라켓과 키를 대보자며 놀려댔지만, 나는 지지 않으려고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했다. 아침 일찍 나와 연습하고, 수업 끝난 후부터 해질 때까지 또 연습했다. 어두워지면 서둘러 학원으로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늦게 집에 들어가면 몸은 기진맥진했다.

키가 작은 나는 항상 전위가 아닌 후위를 맡아 뛰었다. 또 힘이 약해 볼을 강하게 때리지도 못했다. 하지만 게임 운영은 오히려 남보다 잘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힘으로 볼을 치지 않고 머리로 게임을 하는 아이라고들 했다.

키가 작고 약해도 최종 선수 8명에 선발이 되었다. 드디어 테니스 선수로서의 생활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이다. 내가 바라고 원하던 테니스 선수가 되다니, 꿈같은 일로 꿈이 이루어졌다. 테니스부원은 체육선생님이 봐줘서 되었지만 정식 선수 8명에 뽑힌 것은 내 실력으로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공부 1등보다 운동선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때는 내게 더 큰 성취였다.

선수로 선발된 후 본격적인 대회 연습에 들어갔다. 대회전에는 모든 선수가 함께 합숙하며 온종일 훈련을 했다. 이후 나는 매년 수없이 많은 충청남도 대회뿐만 아니라 전국체전과 동아일보 주최 전국 테니스대회까지 명실공히 학교 대표 선수로, 충청남도 대표 선수로 참가하였다.
대전을 비롯하여 홍성, 태안, 서산, 공주, 천안 등 각 지역을 돌면서 한 대회에 결승전까지 최소 일주일씩 걸렸다. 그 기간에는 학교를 결석해야 했다. 시합 때마다 우리 학교는 항상 단체전 우승을 맡아놓고 했지만, 개인전에서 나는 1등을 차지해본 적이 없다. 키와 몸집이 작은 내가 3등은 여러 번 했으니 그것으로 대단한 일이라고 위안했다. 실제로 전국체전이나 동아일보 주최 전국대회 등에 나가면 선수 중에서 내가 가장 작았다.

이렇게 많은 시합에 나가고 합숙 훈련을 하느라 사실 수업을 빼먹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어떤 때는 시합 가기 전에 학교 시험 시기와 겹치면 시험만 보고 바로 떠나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한 번은 서울에서 열린 시합으로 일주일 만에 학교에 나갔다. 그때 친구들이 내게 불평을 늘어놓으며 타박했다.

“너 때문에 영어 수업시간에 우리만 야단맞았잖아.”

“왜?

“영어 시간에 조용연 선생님이 너희들은 시험 답안지를 발로 썼냐? 송지호는 수업 안 듣고도 100점 맞았는데, 너희는 수업 다 듣고도 점수가 그게 뭐냐며 야단을 치셨어.”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친구들에게는 미안하기도 했다. 내가 전국체전 운동선수가 됐다는 사실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송씨 가문에서 돌연변이로 유일한 운동선수가 하나 나왔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공부 안 하고 어떻게 일등을 해?

운동하랴 공부하랴 참 바빴다. 운동선수들 대부분이 운동한다는 이유로 공부와는 담을 쌓았지만, 나는 중학교 3년간 테니스 선수 생활을 하면서도 전체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결혼할 때,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의 성적표와 모든 상장을 고스란히 보내주셨다. 그 성적표나 상장들을 지금 내가 봐도 그 시절의 내가 기특하다.

시험 때만 되면 몇몇 친구들은 경쟁적으로 자기 집에 가서 공부하자며 나를 졸랐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와 친한 혜숙이는 어머니와 언니도 나를 무척 아껴주셨다. 시험 때마다 혜숙이가 나를 끌고 가면 혜숙이 어머니는 나로서는 구경도 하지 못한 귀한 삼계탕까지 끓여 먹이면서 딸처럼 잘해 주셨다. 한번은 같은 테니스 선수인 경복이가 자기네 집에 가서 같이 시험공부를 하자고 했다. 경복이 아빠는 우리 학교 교무과장이었는데, 경복이와는 매일 같이 테니스도 하고, 같은 반 친구로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샘이 많은 경복이는 가끔 내게 이런 질문을 하곤 했다.

“너는 운동하고 집에 가면 밤새워 공부하지?”

“운동하고 집에 가면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자야지 어떻게 공부를 밤새워서 해?”

“그런데 공부를 안 하고 어떻게 1등을 해?”

경복이는 끝내 내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정말 몸이 약했던 나는 운동하고 집에 가면 기진맥진해서 밥 먹고 자기도 바빴다. 더군다나 약한 체력으로 1학년 첫 학기에는 학원 강의를 늦게까지 해야만 해서 힘든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내가 집에서 공부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어주는 친구는 없었다.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공부도 안 하고 어떻게 1등을 할 수 있어?”

그렇게 되물었지만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밖에서 누구보다 재미있게 놀고, 엄마 심부름을 했다. 그러면서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것이라고 항상 생각했다. 방 한 칸이 전부인 우리 집에 책상 하나도 없었고, 숙제라도 하려면 밥상 위에서 하거나 방바닥에 엎드려서 해야 했다.

나는 학교 수업시간만큼은 누구보다 열심히 집중해서 들었다. 열심히 집중해서 들으면서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것을 머리에 다 넣었다. 그것이 내 공부의 전부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