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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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3)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7.08 11: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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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어린 시절 한 단계마다 취한 선택이 내 인생과 연결된 다리였다. 그 당시 시골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여학생은 약 10% 남짓이었고, 고등학교 진학률도 높지 않았던 시절이라 대전에서는 대전여고만 나와도 충분히 자랑스러운 시절이었다.

다시 영·수학원 차린 당찬 소녀 강사

대전여고에 합격하고 입학식까지는 두 달 남짓의 시간이 있었다. 나는 이 두 달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3년 전 경험을 살려보고자 했다. 이제는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여 영어, 수학, 과학 학원을 내기로 했다. 개학 후 테니스 선수를 계속하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 친구 최영희에게 같이 학원 강의를 하자고 부탁했다. 내가 영, 수를 맡고, 영희는 과학을 맡기로 했다.

또 만약 내가 테니스 연습으로 늦는 경우 영희가 먼저 수업을 시작해달라고 하니 한결 마음도 편했다.

친구도 쾌히 응낙했고 나는 초등학교 졸업 후에 차렸던 경험을 살려 서울양복점 3층 같은 장소에 학원을 냈다. 역시 20명으로 제한해서 이번에는 한 학생당 1,000환으로 올려 받았고, 수입의 1/3은 영희에게 주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영어, 수학을 가르치는 일이 재미있었고, 돈도 벌 수 있어 일거양득이었다. 눈썹이 유난히 까맣고 예뻤던 영희도 열심히 가르쳤고, 학생들도 언니 같은 선생님인 우리를 좋아했다.

3월 입학식을 한 후에도 학원은 일단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입학하자마자 반장 부반장을 뽑는 시간에 내 이름이 거론될 때 펄쩍 뛰며 할 수 없다고 했던 것도 실은 학원 때문이었다. 내가 학원을 하자면 테니스 선수 생활을 계속 하는 한 도저히 다른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한밭여중과 대전여고가 같은 교정에 있었고 테니스장도 같이 사용했기 때문에 코치도 같은 코치였다. 충청남도 여자 중등부에서 항상 1등을 차지했던 한밭여중 테니스 선수들이 그대로 대전여고 테니스 선수가 되었다. 친구 귀선이만 이화여고 테니스 선수로 스카우트되어 떠났다. 귀선이는 아예 테니스 선수의 길을 택해 나중에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했다.

고등학교 2학년 말까지 나는 학교 대표 선수 생활을 하면서 모든 대회에 원정시합을 나갔다. 충청남도 대표 선수로 매년 전국체전 테니스대회, 동아일보 주최 테니스대회 등 전국 단위 테니스대회에 참가했다.

충청남도 고교 테니스대회에서는 언제나 우리 학교가 우승했고, 전국체전에서는 3등을 차지하는 활약을 펼쳤다. 그러다 보니 학원을 계속하는 일이 시간에도 쫓기고 힘에도 부쳤다.

그래서 친구와 상의한 끝에 개학 후 석 달 동안 더 하고 접기로 했다.

그때 도와준 영희가 정말 고마웠다. 영희는 나중에 약대에 진학해서 대구에서 약국을 냈다.

학원을 운영하여 번 돈은 모두 어머니께 드렸고, 나는 고등학교 때도 3년간 학교 장학생으로 다녔다. 고등학교 성적도 마찬가지로 3년 동안 거의 1등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3학년 때는 경희대 주최 전국 영어 수학 학력 경시대회에서 전국 3등에 입상하기도 했다. 당시 각 반 1등 학생 중에서 다섯 명이 학교대표로 선발되어 나간 대회였는데, 우리 학교에서는 내가 유일한 입상이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공부할 양도 많아져 테니스 선수 생활은 2학년으로 끝냈다.

하늘이 주신 인연 Mr. Friend

2학년 때의 일이다. 매주 토요일 오후에 1시간씩 미군 부대 장병들이 학교로 와서 영어를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신청했다. 첫 수업을 듣던 날, 선생님은 Mr. Friend로 자신을 소개했다.

Mr. Friend는 약 3개월 동안 12번 수업을 통해 우리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셨다. 무엇보다 Friend 씨는 영어를 잘하는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셨다. Friend 씨는 50세가 넘는 분으로 머리가 달걀처럼 반짝이는 대머리여서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였다. 따뜻하고 온정적인 분으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나 같은 고등학교 다니는 두 딸이 있다고 했다.

Friend와의 인연은 영어 수업이 종료된 후에도 이어져 그분이 미국으로 귀국한 이후에도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시절에는 전화도 없는 때라 통신수단이라고는 편지가 유일했다. Friend 씨가 내게 보내오는 편지 첫머리에 언제나 “Dear Daughter of the east.”였다. 처음에는 그 첫머리 글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동양의 딸이 되다니.’

내가 어려움으로 좌절을 겪을 때 그는 “They can who think they can(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이룰 수 있다)라는 주옥같은 말을 내게 주었다. 그 후 힘들 때마다 그 말은 내게 큰 힘과 용기가 되어주었다.

아빠 없는 나는 아버지처럼 내게 사랑을 베푸는 그분을 나도 서양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 후 나의 답장에는 언제나 “Dear father of the West.”로 시작했다. 편지 제목처럼 Friend 씨는 나에게 아버지처럼 자상하게 모든 일에 관심을 보였고, X-mas나 내 생일에는 항상 편지와 20달러짜리 지폐, 액세서리 등 선물을 동봉해 보내주셨다. 나는 매번 받기만 하는 것이 미안해서 나도 선물을 보내드려야겠다고 궁리한 끝에 우리나라 전통 엿인 호박엿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1965년 당시 동네 가게에 파는 물건이라고는 그 정도였기에 다른 마땅한 선물도 없었다. 그런데 포장이 문제였다. 엿은 종이에 들러붙기 때문에 생각 끝에 나는 파란색 비닐우산을 잘라서 비닐 포장을 하기로 했다. 

우산이 아깝기는 했지만, 우산비닐을 잘라서 깨끗하게 닦아 호박엿을 포장하고, 편지에 ‘Traditional Korean Cake’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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