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각리 점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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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각리 점빵
  • 강형일기자
  • 승인 2021.07.15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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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鄕愁)
옥각리 은행나무(옥천군 제1호 보호수)
옥각리 은행나무(옥천군 제1호 보호수)

옥각리(玉覺里)는 지금이야 잘 뚫린 도로 덕분에 읍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구읍이 옥천의 중심이었던 예전에는 산으로 막혀 외떨어진 아늑한 마을이었다. 그럼에도 그 규모와 주민 수는 상당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평화롭고 살기 좋은 주거지로 인기가 많아 158세대의 주민이 살고 있다.

산이 둘러싸고 있어 골짜기가 많으며 마을 앞으로 서화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옥각(옥곤리), 각신 등이 있다. 옥곤은 마을 뒷산에 차돌이 옥같이 박혔다 하여 구슬 옥자와 산 이름 곤 자를 써서 만든 지명이다. 옥각과 각신의 이름을 따서 옥각리라 했다.

마을 입구에 수령 400년 넘은 옥천군 제1호 보호수(1982년 11월 지정)인 은행나무가 있다.

현 위치상 이백리에 있는 이지당(보물 제2107호) 또한 조선 중엽 서당을 세웠던 옥각리 금씨(琴氏)·이씨(李氏)·조씨(趙氏)·안씨(安氏)의 네 문중에서 1901년에 이 건물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입으로부터 조금 더 들어가 마을회관을 지나면 시원하게 넓혀진 마을 길옆에 한눈에 보아도 아주 오래된 집임을 알 수 있는, 낡긴 했지만 정감 있는 집을 만날 수 있다. 담은커녕 대문도 없고 여닫이 문은 열려 있다. 게다가 간판도 없다. 보기 드문 ‘촌 가게’가 분명하다.

인자하게 생기신 나이 지긋한 두 내외분이 번갈아 가며 가게를 보시는데 사실, 젊은이가 모두 떠나고 어린아이도 없는 지금의 점방에 무슨 손님이 그리 찾겠는가. 기껏해야 음료수 몇 종류, 먼지와 노는 과자 몇 봉지 놓고 간간이 찾는 담배 손님을 맞는다. 그런데, 오른쪽 열린 안방 문틈으로 옛날식 건넌방까지 아늑하게 엿보이고 왼쪽으로는 술청(간단한 탁자를 놓고 술을 마실 수 있게 한 곳, 옛날 선술집 형태)처럼 보이는 공간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회상에 잠긴 금기년 어르신
회상에 잠긴 금기년 어르신

이 마을 토박이인 금기년(82) 씨와 김태순(81) 씨 내외분, 한사코 마다하시는 안주인은 어쩔 수 없고 바깥어른과 증약막걸리 반주전자와 마늘쫑 장아찌를 앞에 놓고 살아오신 이야기와 마을의 역사를 여쭈었다.

“가난해서 대전공고를 다니다 말았지. 월사금이 밀려서. 아버님이 철도 공무원이셨지만 7남매나 되니(그땐 그랬다) 늘 돈에 쪼들렸어. 둘째인 내가 양보해야지. 아래로 동생이 다섯이나 더 있는데” “그전에 옥천중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도 수업료를 못 내서 졸업장을 안 주더라니까. 나중에 주긴 했지만” “고등학교 다닐 때 도둑 열차도 엄청 탔지. 옥천역에서 기차를 타면 승객 칸이 하나밖에 없어서 화물칸에 콩나물처럼 잔뜩 끼어서 대전까지 통학했거든, 캄캄한 세천 굴을 통과하려면 난리도 아니었어” “고등학교 다 못 다니고 그때는 뭐 특별하게 할 일이 있나. 이리저리 떠돌며 놀다가 동네에 이북서 온 목수가 따라다니라고 해서 못 주머니 차고 조수 노릇 했지. 그렇게 시작한 목수 일을 15년 전인 67세까지 했어. 결혼? 스물 다섯살에 해서 4남매를 두었는데 셋째는 일찍 하늘나라로 갔어. 나보다 엄청 착한 아내 덕에 쉽지 않은 세월 그럭저럭 잘 지냈지. 오늘도 아내가 먹고 싶다고 해서 저기 군북까지 나가 흑염소 사다가 먹였어”

가게는 언제부터 하셨나요?

“한 40년 넘었지. 그전에 가게하던 사람한테 넘겨 받았거든. 얼추 삼십 년 전에 저짝(쪽)에서 담배 팔던 사람한테 25만 원 주고 판매권을 사서 담배도 팔게 됐고, 옛날에야 할 만했지만 지금이야 닫아놓기 뭐해서 소일거리로 열어놓고 있는거지. 몇몇 동네 사람들 가끔 들러 막걸리나 몇 종지씩 먹고 옛날얘기나 나누다가 가곤 하는 선술집이지”

참 귀한 장소입니다.

‘가맥’이라고 가게에서 마시는 맥줏집들도 도시에서 유행인데 어르신 가게는 영락없는 ‘주막’입니다.

“이지당을 생각하면 참 아쉬운 점이 있어. 원래는 서당 바로 뒤편 산자락에 오래되고 잘생긴 고목이 몇 그루 있었는데 몇 해 전에 한마디 상의도 없이 잘라 내버렸더라고. 물가 바위 옆에 있던 굽은 팽나무도 그렇고. 그 나무가 아주 좋은 그늘을 드리워 줬었거든. 덧붙이면 옛날 책들이 엄청나게 많았었는데 모두 다 어디로 갔나 몰라.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장수 발자국’ ‘말 발자국’이라고 말하던 팽긴(패인) 바위도 물에 잠기기 전에 있었고. 마을 입구에 잘 생기고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1988년 큰 홍수 때 떠내려가 버렸거든. 마을 사람들이 깜짝 놀라 물길을 따라 찾아보니 뿌리째 뽑혀서 공주까지 떠내려 갔더라고”

“6‧25 사변 때는 우리 동네가 엄청난 전쟁터였어. 철로가 있으니까 비행기 폭격도 어마어마했고. 내가 그때 채 열 살이 안 됐을 땐데 외갓집인 마전으로 피난도 갔었지. 저기 서정리 물방앗간 앞에 탱크가 진을 치고 있었지. 나보다 몇 살 더 먹었을까, 인민군 소년병이 제 키보다 큰 따발총을 질질 끌고 다니더라고. 낮에는 마을에 있다가 어두워지면 싹 산속으로 숨고 그랬지”

80년의 세월이 한 시간 만에 모두 흘러갔다. 여전히 건강하고 말씀도 재미있게 하시는 금기년 어르신 덕에 처음 듣는 지난날의 마을 풍경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펼쳐졌다가 스러져갔다.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560년 전인 1460년께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일각에서는 봉화 금씨가 먼저 들어왔다고 하고 일부에서는 순흥 안씨가 먼저 들어왔다고 한다. 특히 봉화 금씨 문중은 이곳에서 터를 잡은 후 이원면 윤정리 등지로 자손이 퍼져 나가는 등 옥천에서 봉화 금씨 본거지 역할을 해온 유서 깊은 마을이다. 평화롭고 아늑한 마을을 뒤로하고 걸어 나오는 길에 서서히 황혼이 드리운다.

여전히 수줍음 많으신 김태순 어르신
여전히 수줍음 많으신 김태순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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