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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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4)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7.15 1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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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국제우체국에 가서 거금을 주고 보냈다. 그 후 선물을 잘 받았다는 답장은 받았다. 하지만 잘 먹었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어 마음에 걸렸다. 생각해보면 과연 내가 우산비닐 조각에 싸서 보낸 호박엿을 Friend 씨가 먹었을까,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때 나로서는 정성을 다한 선물이었다.

아마 Friend 씨는 그 선물을 받고 우리나라의 가난을, 미군 지프 한 대만 지나가도 동네 아이들이 새까맣게 뒤쫓으며 “기부미 초콜렛, 기부미 껌.” 하던 마음 아픈 장면을 다시 떠올렸을 것이다.

내가 간호학을 선택했던 이유 중의 하나도 Friend 씨가 간호사를 너무 좋아했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내게 평소 보내온 편지에서도 ‘간호사처럼 남을 위해 봉사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훌륭한 직업이 어디 있겠냐’며 간호사에 대한 큰 호감을 나타냈었다.

아마도 그의 진실한 신앙에서 오는 봉사 정신과 무관치 않은 호감이었을 것이다. 내가 운명적으로 간호학을 선택했을 때, 가장 기뻐해 주고 격려해준 분도 바로 Friend 씨였다.

그 시절 미국에서는 이미 간호사 대우가 상당히 높았고, 갤럽조사가 시작된 이래 매년 신뢰도가 가장 높고 정직한 직업 1, 2위를 차지할 만큼 간호사 인기가 있었다. 내가 간호대학 입학 후 적성에 맞지 않아 방황할 때도 나의 모든 생각과 고민을 서양의 아버지인 Friend 씨에게 숨김없이 털어놓았고, Friend 씨는 내게 진심 어린 사랑으로 해결해주고자 했다.

내가 힘든 시기에도 물심양면으로 아버지 같은 사랑을 내게 넉넉하게 베풀어 주신 분이었다. 또 내가 간호대학 시절 좌절과 절망으로 힘들어할 때, Friend 씨는 미국 전역 44개 대학에 편지를 보내 “동양의 한 스마트 걸에게 귀 대학이 전액 장학금을 제공해서 키워주면 틀림없이 그녀는 후에 귀교를 빛낼 것으로 믿는다.”라고 설득했다.

MIT, 존스홉킨스대학교(Johns Hopkins), 워싱턴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 등 11개 대학에서 긍정적인 답장을 보내왔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는 확답까지 해왔다. 고민 끝에 나는 존스 홉킨스로 결정하여 편지를 보냈고, 존스홉킨스대학에서는 등록금 전액과 숙식 무료제공 등 최고의 여건을 제공하겠다는 최종 레터를 보내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만 내 사정으로 연기하고 말았다.

Friend 씨로부터 아버지 같은 큰 사랑을 받았지만, 나는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는 나에게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그 고마움을 나에게 갚지 말고 내가 너에게 한 것처럼, 너도 남에게 그렇게 해라. 그것이 나에 대한 고마움을 갚는 것이다.”

성경 말씀을 몸소 실천하시는 하나님을 닮은 그분의 사랑을 나도 살아가면서 갚겠노라고 다짐했다. 내 인생에서 Friend 씨는 사랑을 실천으로 보여준 훌륭한 분이셨다.

전국 영어·수학 학력경시대회 3등 입상

2학년 말이 되어서야 테니스 선수 생활을 접고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당시 여학생의 대학진학률은 10% 남짓 정도여서 요즘처럼 일찍부터 입시문제가 대두되지는 않았다. 그런 시절에도 2학년 무렵부터 잠을 쫓는 정체불명의 약까지 먹어가며 밤새워 공부하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대학진학에 대한 계획은 구체적으로 하지 못했다.

3학년이 되자 대학 진학문제가 코앞에 닥쳤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고민이 시작될 무렵, 나는 경희대학교 주최로 열리는 ‘전국 영·수 학력경시대회’에 우리 학교대표로 선발되었다.

각 학교에서 5명의 대표가 참가하는 이 대회는 단체상도 있었지만, 특히 개인상은 모든 참가 학생들이 받고 싶어 하는 상이었다. 개인상 3위 안에 입상하면 경희대 4년 전액 장학금 지급, 외국 유학비 지원, 외국 유학 후 경희대 교수로 채용되는 큰 특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경시대회 참가를 위해 선생님과 함께 이번에는 테니스 선수가 아닌 공부 선수로서 서울행 완행열차를 타고 가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경희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 촌놈들은 무사히 서울에 도착하여 경희대 근처 여관에 묵게 되었다. 그날 저녁은 선배들이 한턱을 냈다. 경시대회에 참가했던 선배들이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그 자리에 참석한 선배들은 전교에서 5등 안에 들어 이 대회에 참가했던 선배들이었고, 모두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배지를 달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그 자리에서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화여대 영문과에 다니는 선배의 말이었다.

“은원이가 다니는 메디컬센터 간호학교를 가보니 정말 한국 속의 외국인 학교던데? 외국인 교수에, 기숙사는 보일러가 들어와서 겨울인데도 외국영화에서나 본 장면이야. 실내에서 반소매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걸 보니 너무 부럽더라. 기숙사 안에 목욕탕도 있고, 응접실에는 커피 세트도 있어서 커피도 타서 마실 수 있고… 완전 외국 같았어. 우리 서울대, 이대 나오면 뭐하니? 메디컬센터는 전액 국비 장학금에 기숙사 무료제공, 졸업 후 미국, 캐나다, 스칸디나비아 3국 어디든 원하면 해외 취업이 다 된대.”

다른 친구들은 흘려보낸 그 말이 왜 내게 꽂혔는지, 정확하게 나를 위해 존재하는 대학인 듯했다.

‘전액 장학금에, 멋진 기숙사에서 무료로 살 수 있고, 졸업 후 미국 취업을 할 수 있다면, 미국으로 가서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나를 위해 만들어진 맞춤형 대학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처음 알게 된 대학이었지만 나는 어느새 메디컬센터 진학으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입학시험은 일반 대학보다 먼저 특차로 진행된다는 정보까지 들었다. 경시대회 시험을 치르기 위해 다음날 경희대학교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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