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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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5)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7.22 15: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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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경희 대 학력경시대회가 실시되는 배경 설명을 들었다. 즉, 경희대가 신설 대학이라 설립자인 조영식 박사가 우수학생 유치를 위해 매년 학력경시 대회를 개최하여 개인 3위 안에 입상한 학생에게 특전을 주어 우수학 생을 유치하고 학교를 홍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미 메디컬 센터의 매력에 푹 빠진 나에게 경희대의 특전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시험 결과 대전여고에서 유일하게 내가 3등 입상의 영광을 안았다. 다른 친구 네 명은 먼저 내려가고 나는 다음날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 해 선생님과 머물렀다. 3등 입상을 했지만 나는 경희대에 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얼마 후 대학 입학원서 쓰는 시기가 돌아왔다. 나는 메디컬센터에 다니는 박은원 선배에게 학교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그 선배 말에 의하면 NMC(National Medical Center, School of Nursing)는 4년제가 아니고 3년제 대학이었다. 3년제라는 사실은 나의 구미를 더 당기게 했다. 1년 더 빨리 졸업하면 취직도 빨리할 수 있고 미국도 1년 빨리 가서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4년제를 졸업하든 3년제를 졸업하든 모두 같은 간호사 국가시험을 보고 같은 면허증을 받는다는 사실에 당연히 3년제를 선택하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선생님께 NMC에 원서를 내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펄쩍 뛰었다. 

“너는 간호사가 맞지 않아. 그리고 간호사 하기는 아깝고. 왜 적성에 맞지도 않는 과를 선택하려고 하지?”

선생님은 결사반대하셨다. 옆에서 지켜보던 영어 선생님도 거드셨다. “너는 영어를 잘하니까 이대 영문과 가서 시집이나 잘 가라.”

하지만 나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자 두 선생님이 똑같이 나를 설득했다.

“정 그러면 차라리 장학생으로 갈 수 있는 경희대학교로 가서 나중에 그 대학교 교수를 하면 어떻겠냐?”

지금은 경희대가 좋은 대학이 되었지만 67년 그 당시에는 신설 대 학이라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그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경희대 가려면 은행에 취직할래요.”

그 당시 여자들의 취직은 매우 어려운 시대였기 때문에 은행은 여자들의 최고 직장이었다. 그런데 매년 상업은행에서 대전여고에 2명씩 추천 의뢰가 오기 때문에 그때 내가 원하면 은행 취직은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선생님은 더는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하셨는지 할 수 없이 NMC에 원서를 써 주셨다. NMC를 알게 된 것도 우연이었지만 이 우연으로 내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초중고 시절, 공부 하나만큼은 누구보다도 잘했던 나는 마음속에 몰래 그 당시 이름을 떨친 황산성 여성 1호 변호사 같이 되는 꿈을 꾸기도 했고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여자 국회의원이 되어 나라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소망도 있었다. 그러나 대학진학은 당연히 생각했지만 어느 대학 어떤 전공을 할 것인지 깊이 고민해본 적도 없었다. 그저 주어지는 대로 공부든 운동이든 문학이든 남달리 잘해내기만 하면 나는 장래에 틀림없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으로만 살았다.

그런데 전국 영·수 학력경시대회에서 만난 한 선배의 NMC 찬가에 홀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간호학이라는 낯선 미래를 만나게 된 것이다.

희망은 가난 속에서 공짜로 누리는 제일 멋진 축복

내 나이 겨우 두 돌 때 6.25 전쟁을 만났다. 전쟁 이후 나 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가난과 싸우는 빈곤한 시대를 살아야 했다. 땅 한 마지기 없는 시골 사람들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살았다.

피난살이 때 할머니 밥상에 오른 고등어 한 토막이 먹고 싶어 입맛 다시며 기웃거리면 할머니는 차마 다 드시지 못하고 반 토막을 일부러 남기셨다. 그러나 고모네 식구가 다음으로 그 상을 얼른 차지하고는 할머니가 남겨두신 고등어 반 토막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워 버렸다. 그때 나는 너무 속상해서 눈물을 글썽이곤 했다.

겨우 우리 차례가 되어 밥상 앞에 앉으면 먹을 반찬이 거의 없었다. 정말 그때는 쌀밥 한 그릇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들에서 뜯어온 나물을 잔뜩 넣고 쌀 한 줌 겨우 넣어 멀겋게 끓인 죽 그릇을 보며 수저로 휘휘 저어만 보고 배가 고픈데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적도 있었다.

밥상을 가져오면 말이 밥그릇이지 그 속에는 거의 감자와 고구마가 차 지하고 있었다. 그러면 젓가락으로 고구마나 감자를 꾹꾹 찔러 다 꺼내고는 그릇에 한두 수저 남아있는 밥을 보면서 밥을 먹고 싶은 마음에 눈물이 나기도 했다.

“나는 밥이 먹고 싶단 말이야.”

그렇게 투정 부리는 자식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유년 시절 가끔 외할머니가 내 밥만 쌀밥을 담아주시면 나는 그 밥을 먹는 것도 아까워 조금씩 떠서 아주 천천히 아끼면서 먹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라에서는 쌀을 절약하기 위해 매주 수요일을 ‘분식의 날’로 정해 밀가루 음식만 먹게 했다. 매일 점심시간이면 선생님이 교실을 돌면서 도시락 검사를 했다. 보리가 반 이상 섞여 있는지 확인 한 것이다. 도시락에 쌀이 더 많으면 보리를 더 섞으라고 일종의 경고 를 받았다. 영양실조가 많아 아이들 얼굴엔 하얀 버짐이 피었고 아파도 병원에 갈 수도 갈만한 병원도 없었다. 그야말로 병원 가는 것 자체를 모르고 살던 시대였다. 감기가 들어 누런 코를 달고 살던 아이들 대부분은 손수건도 휴지도 없어 그저 손등으로 쓱 문질러 코를 닦아냈다. 그렇게 콧물이 묻은 손등은 튼 것으로도 모자라 항상 터지고 갈라져 피가 났다. 미국에서 일주일에 한 번 구호물자로 보내준 가루우유를 학교에서 큰 통에 끓여 한 국자씩 퍼주면 우리는 줄을 서서 맛있게 받아먹으며 잠시나마 배고픔을 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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