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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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28)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1.07.2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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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趙憲)과 이발(李潑)의 우정

조헌이 밤티로 들어온 다음 해에 가장 가까웠던 친구 이발과 결별하는 가슴 아픈 일을 겪는다. 

이발(李潑 1544~1589)의 자는 경함(景涵)이요 호는 북산(北山) 또는 동암(東庵)이다. 30세에 문과 알성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고 동인의 강경파로 북인의 영수였다. 

조헌은 성혼과 율곡을 스승으로 섬겼고 그 동료 가운데에서도 이발과 가장 친분이 있었다. 이발도 조헌을 소중히 여겨서 그의 등용과 불등용에 자신의 진퇴까지 건 적이 있었다.

율곡이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있을 때 이발은 이조좌랑(吏曹佐郎)이었다. 이발은 조헌을 크게 등용하고 싶어 했다. 그는 율곡에게 조헌의 등용 문제를 이렇게 말한다.  

“여식(汝式)을 쓴다면 크게 등용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두고 불문에 부치는 것이 옳다” 라고 했다. 

이에 율곡은 “여식(汝式)이 비록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큰 뜻이 있으나 그의 재능이 미치지 못하며 고집이 극심하여 시세(時世)를 헤아리지 않고 자기의 뜻과 같지 않으면 강경한 언사로 간(諫)할 우려가 있으니 자네가 이미 헌(憲)과 마음으로 교분이 있어 그를 발탁하는데 몰두하여 그것이 성공하더라도 여식에게 이로운 것이 없고 도리어 해가 될 것이다. 듣자 하니 요즈음 여식이 글을 읽고 있다 하니 오륙 년을 기다려 그의 학문이 성숙한 연후에 그를 등용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자네는 깊이 생각하라”고 이발에게 아직은 조헌을 크게 등용할 때가 아니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이발은 “어려서부터 글을 읽은 여식(汝式)에게도 이공(李公)의 말씀이 그러하거늘 하물며 본래 글을 읽지 못한 우리야 어찌 하루라도 벼슬을 살 수 있겠습니까”하고 이조 좌랑을 사퇴하고자 하니 율곡도 이를 말리지 못했다.

조헌이 옥천에 내려와 초야에 묻혀 세월을 보내는 동안 조정에서는 사색당파가 극에 달했다. 율곡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정여립(鄭汝立)이 율곡과 성혼을 모함하는가 하면 이발도 이에 동조하기에 이르렀다.

정여립은 전주 출신으로 157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율곡과 성혼의 각별한 후원과 더불어 촉망을 받던 인물이다. 그의 사상은 대단히 개혁적이었다. 

1583년 예조정랑(禮曹正郎)을 지냈고 수찬(修撰)에 올랐다. 본래는 서인이었으나 수찬이 되면서 동인 편에 서서 율곡을 배반하고 성혼을 비판한다. 정여립이 팔을 휘저으며 큰 소리로 말하기를 “계미년(癸未年) 춘하 간(春夏間)에 이이(李珥)의 무상함을 깨닫고 서한을 보내 절교를 알렸는데 일찍 절교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고 했다. 이에 세상 여론이 들끓고 모두가 정여립에게 침을 뱉고 욕하자 몰래 도망쳐 달아났다. 그러나 이발은 오히려 세상 여론이 그르다고 하여 정여립을 두둔하고 나섰다. 이에 조헌과 대립하기에 이르렀고 서로 왕복하며 시비를 논변(論辯)하였으나 이발이 듣지 않자 절교의 서한을 보낸다. 

눈보라가 치는 추운 겨울날, 조헌은 김포에서 이발을 만나러 길을 나섰다. 이발에 대한 애정이 깊어 늘 그의 태도를 개탄해 마지않았다. 비록 절교의 서한은 보냈으나 그를 회유하여 바로잡아야 한다는 친구로서의 걱정은 여전했던 것이다. 그는 남평으로 가는 길에 호서의 홍가신을 찾는다. 

홍가신(洪可臣 1541~1615)은 일찍이 조헌과 교류하던 인물이다. 그 무렵 홍가신은 호서지방에서 벼슬을 했고 이발은 전라도 남평에 살고 있었다. 

조헌이 홍가신과 얘기하면서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를 지극히 추장(推獎)하고 존경한다는 뜻으로 얘기를 했다. 이에 홍가신은 “율곡은 소인이란 평을 면하지 못한다.” 라고 율곡을 소인으로 폄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조헌은  “당신이 나를 앞에 두고 공공연하게 작고한 스승을 소인이라 배척하니 당신의 심사를 알만하다.” 하고는 옷자락을 떨치고 일어섰다. 난처해진 홍가신이 농담으로 그런 것이라고 변명하고 만류하였으나 조헌은 들은 척도 않고 남평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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