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님, 우리 이장님] “품어주고 들어주면 다 해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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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님, 우리 이장님] “품어주고 들어주면 다 해결됩니다”
  • 김병학기자
  • 승인 2021.07.27 16: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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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북면 와정리 김우태 이장
와정리 김우태 이장은 사심에 앞서 진정으로 주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보듬어 주면 풀지 못할 문제는 하나도 없다고 강조했다.
와정리 김우태 이장은 사심에 앞서 진정으로 주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보듬어 주면 풀지 못할 문제는 하나도 없다고 강조했다.

“사심을 버리고 주민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면 주민들이 먼저 알아 봅니다”

올해로 만 20년째 군북면 와정리 발전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김우태(65) 이장.

남들이 보면 무슨 이장을 그리 오래 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나 그건 김 이장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기보다는 마을 주민들의 의견을 먼저 존중하고 모든 의견들이 다 도출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의견을 조심스레 꺼내면 비록 주민들의 의견이 지배적이라 할지라도 김 이장의 의견이 더 현실적이며 실현가능성이 높음을 안 주민들은 결국에는 김 이장의 의견을 따른다고 한다. 이것이 ‘장수 이장’의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그래서일까, 지난 20년이라는 세월동안 이렇다 할 주민 간 의견충돌이나 큰소리가 난 기억이 없다. 

사실 김 이장은 이곳 와정리가 고향이지만 대전에서 줄곧 생활을 했었다. 그때만 해도 하던 사업(중기업)이 잘 나갔다. 누구 하나 부러울게 없었다. 그래서 그런 나날들만 계속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커다란 착각이었는지를 알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사업 부도로 수많은 나날 뜬 눈으로 지새

그러니까 김 이장이 다시 고향 와정리로 유턴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우리나라가 IMF라는 직격탄을 맞던 1997년 어느 날이었다. 대전에서 가장 크다는 건설업체와 계약을 맺고 중기업을 하던 김 이장에게 해당 건설회사가 갑자기 문을 닫아 버린 것. 너무도 꿈만 같았던 현실 앞에 김 이장은 할 말을 잃고 얼마나 많은 나날들을 뜬 눈으로 지샜는지 모른다.

더 이상 견뎌낼 재간이 없음을 안  김 이장은 나이 드신 부모님이나 모시며 살자는 마음으로 고향 와정리로 회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주민 몇 명이 김 이장을 찾아왔다. “와정리 이장을 맡던 사람이 갑자기 이장직을 못하겠다며 물러난 상황이다. 김 사장 당신이 이장직을 좀 맡아 주면 안되겠느냐”며 거의 어거지로 몰이 세웠다. 황당했다. 그저 노부모님 모시고 농사나 지으며 조용히 살라고 들어 왔는데 뜬금없이 마을 이장을 맡으라니, 그게 말이나 되느냐고 항변했다.

하지만, 이미 마을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전달만 하러 왔다라는 주민들의 말에 김 이장은 또 한번 당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등 떠밀려 이장에 된 김 이장은 기왕 이장을 맡은 바에야 동네 주민들로부터 잘했다는 소리는 못들어도 못했다라는 소리는 안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동네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첫 번째 사업이 105가구에 230여 명이 살아가는 와정리에 번듯한 마을회관 하나 없다는게 짐짓 자존심이 상했다. 다른 면들은 마을마다 한 개씩 마을회관을 가지고 있는데 무려 4개 마을이나 되는 와정리에 마을회관이 하나 없다니 분개감마저 일었다.

즉각 행동으로 옮겼다. 마을회관을 짓는데 들어갈 돈은 6,500만원. 이 가운데 군에서 3천만원은 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 나머지 3,500만원을 조달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궁리를 해냈다. 마을회관 기공식 때 출향인은 물론 마을 유지들을 초청, 회관건립 기금을 모으기로. 여기에 당시 전국적으로 실시되던 ‘퇴비증산사업’에 도전, 2등을 차지 2천만원을 확보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딱 3,500만원이 모였다. 그렇게해서 첫 사업으로 마을회관이 건립됐다.

 ‘향수뜰권역사업’ 도전 50억 따내 귀농·취촌 불협화음 이해할 수 없어

난생 처음 마을 발전을 위해 마을회관을 짓고 나자 또 다른 욕심(?)이 생겼다. 이번에는 옥천군 최초로 ‘향수뜰권역사업’에 도전, 무려 50억원을 따내는 열매를 맺었다. 사심을 버리고 오로지 마을발전을 위하는 일을 하다 보니 이런 열매를 맺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희 와정리는 귀농·귀촌인에 대한 편견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일단 저희 마을로 이사를 오면 제가 먼저 달려가 그들을 안고 최대한 편의를 제공해 줍니다”라는 김 이장은 “그러다보면 그들이 더 마을 일에 협조적이며 앞장섭니다”라고 했다. 귀농·귀촌인들과의 불협화음을 내는 마을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김 이장에게 남는 기억이 하나 있다. 옥천군이장협의회장을 왜 옥천읍에 사는 이장들만 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회의 때 물었다. 면단위 회장들도 군회장을 해야 한다고. 그런데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갔다. 자신이 군회장을 하려고 그런 말을 한게 아닌데 당시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김 이장을 군회장으로 추대해 버렸다. 참으로 어색했다. 그러나 이미 김 이장을 군회장으로 추대한 이상 달리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면단위에서는 최로 옥천군이장협의회장을 맡기도 했다.

“옥천군 9개 읍면 가운데 군북면 와정리만큼 조각난 마을도 없을겁니다. 와정리는 대청댐으로 마을이 3등분 나 버렸으며 마을과 마을을 잇는 변변한 다리 하나도 없습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겁니까. 그러다 보니 마을 아이들도 모두 대전으로 학교를 가고 심지어 장을 보러도 대전으로 가는 실정입니다. 언제까지 이런 모순이 이어질지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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