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민속관의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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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민속관의 나날들
  • 정태희 전 춘추민속관 대표
  • 승인 2021.07.27 17: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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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고 사랑하던 옥천 구읍의 ‘춘추민속관’을 떠나온 지 벌써 여섯 해가 흘렀다. 내 몸보다 소중히 여기며 닦고 쓸고 아껴 마지않던 270년 된 고택을 떠나온 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황금기였고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2001년에 구읍에 들렀다가 거의 허물어져 가는 기품있는 고택을 발견했다. 

사연을 알고 보니 문향헌은 1760년(영조 36년) 김치신이 자신의 호 ‘문향(聞香)’에서 이름을 따 지은 집이고, 1856년에 (상량문, 숭정기원후사병진 12년) 지은 괴정헌은 구한말 문신 오상규가 태어난 곳이다.

1872년 이곳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 범재 김규홍 선생이 1910년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사랑채와 안채, 뜰까지 팔면서 여러 주인을 거쳤다. 

원래 문향헌은 와가 85칸에 초가 12칸의 대궐 같은 집이었다. 하지만 ‘우물 정(井)’ 자 형태의 문향헌과 괴정헌, 행랑채 등 전통한옥 55칸만이 남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소유자가 11명이나 되고 양계장, 미장원, 자전거포, 콩나물공장, 농기계수리소 등은 아예 해체되어 있었다. 그분들을 일일이 설득하는데 거의 3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2003년 세 필지로 되어 있는 전체 건물을 매입하였고 대대적인 보수에 들어갔다. 허물어진 담장을 보수하고 기둥과 처마를 일일이 칫솔로 6개월 동안 닦는 등 정성을 쏟았다. 

내 고향은 지금은 수몰된 충북 청원군 문의면이다. 말하자면 수몰 1세대다. 마을을 휘감아 돌아 흐르는 유려하고 드넓은 금강의 전경이 늘 아른거려서 대청호가 생기고 난 이후에도 틈나는 대로 금강 유역 답사를 다니곤 했다. 

금강 줄기의 상류에 있는 옥천도 그런 이유로 애정을 품고 있던 마을이었기에 유서 깊은 한옥을 최대한 활용하고 내가 하는 국악과 전통문화를 접목한 여러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하고 싶었다. 

4.5t 트럭 10대분 물품 실어 고택에 어울리는 구색 갖춰

진심과 최선을 다해 운영하다 보면 소중한 명소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대전에서 오랫동안 운영해오던 보문산 초입의 ‘춘추민속관(생활문화 사설 박물관)’ 에 그동안 수집해 온 갖가지 민속품과 공예품 그리고 전통유물들을 총동원하기로 했다. 

4.5t 트럭으로 10대분의 물품을 실어 날라 고택에 어울리는 구색을 갖추었다. 그렇게 갖가지 종류의 장독들이 들어선 대갓집에 어울리는 장독대도 만들었다. 

수집한 향토 민속유물들을 구경할 수도 있는 전시관, 효소 만들기와 한옥 짓기 등을 체험하게 할 수 있는 안채와 전통한옥 민박을 할 수 있는 별채, 야외공간으로 나누었다. 2005년부터 주말에는 목단꽃 실내공연장(150명 입장 가능)에서 ‘한옥 마실 음악회’라 이름 지은 공연도 100여 차례 열었다. 총 부지 1,300평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서 한옥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알고 배워갈 수 있는 진정한 체험공간으로 만들었다. 전통혼례, 국악 공연을 할 때면 인근의 도시들에서 찾아온 수많은 사람까지 마당을 가득 메워 일부러 차린 전통 음식과 가양주의 전통에 따라 직접 담근 약주를 마시며 즐거워했다. 

문정리(門井里)라는 마을 이름도 일제강점 후 새로운 이름을 만들면서 마을에 들어오는 길목이 관아에 들어오는 문과 같은 동네라 하여 입문동(入門洞)이라 불렀으며 이곳에는 아주 좋은 샘(샘거리, 샘길)이 있었기 때문에 입문동(이문리)의 문(門) 자와 샘(하정리) 정(井)자를 써서 지어졌다. 문정리라는 지명을 쓰게 한 우물이 있던 곳은 대문과 담장 주변인데 이미 오래전에 파묻혀서 보이지 않는다. 

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 300여 년 된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문향헌 앞에 서서 넉넉한 품을 열어 방문객을 맞이했다.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상서로운 나무로 여겨져 정승 집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한 수종이다. 안뜰에는 200년은 넘게 살은 석류나무가 두 그루 있어서 고즈넉한 고택의 풍경에 운치를 더했다. 여러 기억이 있지만 2012년 7월에 회화나무에 보기 좋은 꽃이 소담하게 피어났는데 10년 만에 핀 꽃이라며 길조라고 좋아하고 내가 정성껏 돌봐서 일어난 경사라는 인사도 많이 받았다. 
그동안 주변 환경이 좋지 못하고 수령이 오래돼 꽃을 피우지 못하다가 내리 3년 동안 막걸리 33말을 먹이며 돌본 결과 힘이 생긴 나무가 꽃을 피워 보답하는 것이었다.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지원 절실

떠나온 지금도 아쉬운 건 걸출한 독립운동가가 태어난 고택이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해 처마 밑 곳곳이 떨어져 나가고 비가 새는 등 문제가 많다는 점이다. 

수억 원이 넘는 사재를 써가며 수리하고 개선하며 관리했지만 늘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다른 부분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을 아끼겠다.

‘잠들어 있는 고택을 숨 쉬게 하겠다’라는 일념으로 운영하다 보니 당시의 문화관광부 선정, 충북 명품고택 제1호로 지정까지 되었던 의미 깊은 고택이 지금은 거의 방치돼있다시피 하다는 소식을 들으니 가슴이 아프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전통과 옛 문화의 살아있는 보고인 구읍에 대한 식견 있는 분들의 관심과 행정기관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관리가 있었으면 하는 점이다.

들은 바로는 옥천군에서도 매입 의사를 타진한 적이 있다 하니 멀리서라도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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