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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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8)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8.12 1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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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전체 5등 안에 들지 못해 경희대 학력경시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면 내가 NMC 를 만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다른 방도가 없었고 그렇게 세월에 밀려 학교를 계속 다닐 수 밖에 없었다.

일부 친구들은 적성에 맞아 적응을 잘했으나 친구들 대부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나와 비슷한 마음들을 안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어떤 친구는 “이 학교가 차라리 없었다면 여기를 오지 않았을 텐데…”라고 원망하기도 했다. 

똑똑하고 예뻤던 30명의 친구 대부분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었고 어쩌면 그것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도 나는 그때 눈물로 쓴 일기장을 보관하고 있다. 그런 이유인지 동기 생 30명 중 나를 제외한 모든 친구들이 졸업 후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간호대학 총학생회장이 되다

간호에 대한 많은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도 주어진 시간은 열심히 살았다. 

기숙사 룸메이트 네 명은 가족과도 같은 특별한 인연이었다. 이화여고 출신의 성옥이는 연세대 가정대학 2학년까지 다니다 재수하여 들어 왔는데 세련되고 멋진 서구형 미모였다. 

또 고전적인 예쁜 얼굴의 성희는 방에 들어오기만 하면 얼굴 마사지에 머리 손질로 시간을 보내기 바빴다. 그러나 가끔 우리 방을 청소해야 하는 당번이 되면 슬쩍 하루를 빼먹어 방 식구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NMC 바로 옆 사대부고 출신인 또 다른 친구는 노래 솜씨가 뛰어나서 우리 학교 모든 행사에서 도맡아 ‘보리밭’을 불렀는데 그 친구는 서울대 음대를 고민하다 우리 학교로 왔다고 했다. 

네 명은 모두 각각의 강점이 있었다. 소규모 미팅을 주선하는 친구, 저녁 시간이면 연애담을 늘어놓아 분위기를 잡는 친구 등 다들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 모습들이 시골뜨기인 나로서는 그저 재미있기만 했다. 

어느 날 멋쟁이 성옥이의 주선으로 적선동 사주보는 집을 가보기로 했다. 그때 우리는 혹시 우리 외모만 보고 좋은 얘기만 해줄지 모르니 모두 식모처럼 꾸미고 가기로 하고 허름한 옷에 머리에 머플러를 뒤집어 쓰고 갔다. 나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가슴이 두근거리고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김봉수 작명소’라는 곳이었다. 대기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지만 접수하고 기다렸다. 그리고 한참 후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용기가 나지 않아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앞에 앉아 있는 할머니에게 송지호가 할머니 손자냐고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나가면서 대답했다.

“저예요.”

“아, 여자로군. 그런데 이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 정말 잘 지은 이름이네.”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내 이름이 그렇게 좋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작명가는 내게 아버지와 어릴 때 생이별을 했고 내 머리가 비상하게 좋으며 복이 많아서 잘 살 거라고 했다. 대학도 다닐 필요 없고 좋다는 남자 누구한테 시집가도 내 복으로 아주 걱정 없이 잘 살 것이라고 덕담을 했다. 좋은 말을 듣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다. 그때 우리 네 명이 작명소를 나서며 친구 덕분에 별스러운 경험을 다했다며 웃어댔다. 그렇듯 우리는 한 방에서 모든 것을 나누는, 친구라기보다는 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2학년이 되어 학생회장 선거가 있었다. 나는 1, 2학년 때 과대표를 연이어 맡았고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시행한 투표에서 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부회장은 이화여고 출신의 얼굴 예쁘고 마음 착하고 똑똑한 김원경이 되었다. 하지만 그 친구와 나는 이미 1, 2학년 때 과대표와 부대표로 일했었다. 그러는 동안 그 친구가 나를 불편해한다는 것도 눈치로 알고 있었다. 짐작컨대 나는 시골에서 올라왔고 그 친구는 서울 이화여고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 에는 학생회장과 부회장으로 만난 것이다.

나는 그 친구의 불편을 애써 모른척하며 자연스럽게 잘 지내고자 노력했다. 회장, 부회장으로 다시 일하게 된 것도 인연이라면 큰 인연이라는 생각에 하루 날을 잡아서 서로 간에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거짓말처럼 친한 친구가 되었다. 원경이는 워낙 남을 위해 봉사하는 성격을 가진 정말 좋은 친구였다. 나에게 둘도 없는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로 지금까지도 미국과 한국간 물리적 공간의 제약없이 가까운 친구로 지내고 있다. 

대한간호학생회에서도 회장과 부회장을 투표로 선출하였다. 전국 4년제와 3년제 간호학과가 통합 구성된 전국 학생회였기에 실제로 4년제 대학 학생회장은 3년제보다 1년 선배였다. 그런 까닭에 회장은 선배인 4년제 대학 학생회장이, 부회장은 3년제 대학 학생회장이 맡는게 관례였다. 대한간호학생회 선거에서 가톨릭 간호대학의 박가실이 회장으로, 내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또 총무는 연세대 장정자, 회계 이화여대 백애영, 서기 철도대 양창순, 음악부장 서울대 박성애, 체육부장 경희대 주영순 등이었다. 이렇게 7명의 전국 학생회 임원으로 맺어진 우리는 일심동체가 되어 정말 좋은 친구로 발전했고 전국 간호대학학생회는 이때가 전성기였다.

존스홉킨스대학으로부터 날아온 전액 장학생 입학 소식

가슴 한구석에 감춰진 간호에 대한 갈등을 미국의 Friend 씨에게 편지로 털어놓곤 했다. 그런 나의 갈등을 해결해 주고자 Friend 씨는 미국의 44개 대학교에 나를 소개하며 귀교에서 이 소녀에게 공부할 기회를 준다면 틀림없이 나중에 귀교를 빛낼 것이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그때 아버지처럼 내 말에 귀 기울여 주고 미래를 열어주려는 Friend 씨의 진정한 사랑에 나는 또 한번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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