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창제의 산파 ‘신미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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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창제의 산파 ‘신미대사’
  • 김동진기자
  • 승인 2021.08.19 1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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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대사의 영정
신미대사의 영정

신미대사부도탑과 신미대사 탱화

승려인 신미대사는 조선시대 세종의 왕사로 한글 창제의 산파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졌다. 세인의 관심을 끌며 한글 창제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설도 종종 제기되어 왔다.

법주사 복천암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500미터 가면 보물 제1416호로 지정된 수암화상탑(신미대사부도탑)이 있다. 1480년(성종 11)에 세워졌고 2004년 10월 7일 보물 1416호로 지정됐다. 공 모양의 탑신이 부드러운 곡선과 함께 안정감 있게 흐른 것을 느낄 수 있다. 복천암 극락전 내부에는 신미대사의 탱화가 보존되어 있다. 

한글 창제의 산파 역할

신미대사(金守溫, 1409~1481)는 조선 초기 선교도총섭을 지낸 승려이다. 본명은 김수성(金守省). 본관은 영동. 아버지는 옥구진 병사, 소윤을 지내고 영의정으로 증직된 김훈이다. 동생은 조선시대 3대 문장가로 유명한 학자이면서도 숭불을 주장했던 김수온이다.

속리사(현재의 법주사)에 출가하여 사미 시절에 수미(守眉)와 함께 대장경을 읽고 율을 익혔다. 그 뒤 세종 말년에 왕을 도와 불사를 중흥시켰다. 세종은 말년에 왕자와 왕후를 3년 사이에 잃게 되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신불(信佛)하였다. 이때 신미와 김수온은 세종을 도와 내원당을 궁 안에 짓고 법요를 주관하는 등 불교 일으키기에 노력했다. 또한, 세종을 도와 복천사를 중수하고 그곳에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했다. 문종은 선왕의 뜻을 이어 그를 선교도총섭에 임명했다. 세조 때는 왕사와 같은 역할을 했다. 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그를 경애하였고 왕위에 오르자 불교의 중흥을 주관하게 했다.

1458년(세조 4)에 나라에서 해인사에 있던 대장경 50부를 간행하고자 했을 때 이를 감독했고 1461년 6월에 왕명으로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훈민정음을 널리 유통시키기 위해 불전을 번역, 간행했을 때도 이를 주관했다. 그의 주관 아래 법화경, 반야심경, 영가집 등이 언해되고 함허 기화의 금강경오가해설의도 교정하여 간행 등 불전의 국역과 유통을 위한 막중한 역할을 했다.

1464년 2월 세조가 속리산 복천사로 행차하였을 때 그곳에서 사지, 학열, 학조 등과 함께 대설법회를 열었다. 또한, 같은 해에 상원사로 옮겨 왕에게 상원사의 중창을 건의하였으며 이에 왕은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을 지어 이를 시행토록 했다. 이 권선문에는 그에 대한 왕의 존경심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세조는 혜각존자라는 호를 내리고 존경했다.

한글 창제와의 관계

한글 창제와 관련하여 월성 스님은 신미가 범어에 능통했던 점, 유학 성향이 강했던 세종이 이례적으로 복천암에 불상을 조성해 주고 시주를 한 점, 세종이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라는 긴 법호를 내린 점, 수양대군 세조가 복천암을 손수 찾았던 점, 유학자들이 당시는 물론 세종이 죽자마자 부녀자 글, 통시 글(화장실 글) 등의 말로 훈민정음을 비난하고 험담한 점, 신미대사의 본관인 영산김씨 족보에 신미대사가 집현전 학사로 언급된 점, 한글 창제 후 실험적으로 지은 곡과 문장이 유교가 아닌 불교의 내용을 담고 있는 점 등을 근거와 함께 거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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