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지인
상태바
아름다운 지인
  • 배정옥 수필가
  • 승인 2021.09.02 11: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금 밖에는 비가 오고 있다. 비가 오고 나면 급격히 추워진다고 TV 기상예보에서 기상캐스터가 방송하고 있다.

나의 나이도 인생의 계절로 치자면 가을에 막 들어서고 있다. 하루의 시간으로 따지면 오후 3시에서 4시에 걸쳐있다고 볼 수도 있는 나이. 

먹을 만큼 먹은 나이가 되고 보니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나 할까. 쉽게 말하면 사람이로되 사람이 아니기를 포기하고 악취가 나는 사람, 사람으로서 진정으로 참되고 도리를 아는 향기로운 사람. 과연 나는 남들이 평가할 때 이 둘 중 어디에 속할지.

이달 초 주말에 지인의 결혼식이 있었다. 한 달 전에 써 놓았던 축시를, 이벤트가 색다른 현시대에 맞춰 그 축시를 신랑의 어머니가 직접 낭송을 하게 해주고 싶었다. 

혼주도 좋은 생각이라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생각대로 착착 항해하는 배가 순풍에 돛 달 듯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시간은 어김없이 다가와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혼주인 신랑 어머니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며 낭송을 부탁해 왔다. 갑자기 분주해진 나는 마음만 급하고 허둥댈 수 밖에 없었다. 미리 말을 했으면 음악도 준비하고 의상도 준비해야 할 텐데, 난감하고 황당했다. 

그뿐이랴 부담감이 없었기에 직장 근무도 해야 하는 날이기도 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그날따라 같이 근무하는 파트너가 사고로 입원하는 사태까지 초래했다. 다급해진 나는 여기저기 아침 일찍부터 주변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도 음악도 보내주고 걱정을 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시 낭송의 동료는 본인도 직장을 다니면서 주말만 쉬는데도 불구하고 열일을 밀어두고 동행도 해주었다. 예식행사에 같이 참여도 하여 직접 음악도 틀어 주었다. 낭송이 끝이 나고 들어오는데 신랑 측 아버지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무사히 낭송이 끝이 났다. 안도의 한숨을 ‘휴’하고 내쉬었다. 예식이 끝나고 하객 중에는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분들도 많이 있었다. 시낭송이 감명 깊고 참으로 좋았다며 칭찬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다음에 본인들 혼사에도 낭송을 부탁하기도 했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살면서 그렇게 어이없이 난감해 해 본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날 미처 챙기지 못하고 생각지 못한 상황에서 나는 줄무늬 양말을 신고 있었다. 결혼식을 실내에서 하는 관계로 당연히 실내화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실내화는 없었다. 많은 하객이 지켜보는 앞 단상으로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신은 양말을 보고 머리는 텅 비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까지 났다.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보고 있는데 눈치를 알아차린 지인이 신고 있던 스타킹을 벗어 바꿔 신자고 했다. 그 지인의 덕분에 모두가 따뜻하고 가슴을 흥건히 적시는 뜻깊은 행사가 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쉬운 건 없다고는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뜻깊은 행사가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가 있기에 심사숙고해서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터.

그날의 아찔했던 순간에 서슴없이 스타킹을 벗어주던 그 배려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남을 것같다. 다시 한번 아름다운 지인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평생을 두고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만남은 아니지만 지나가다 나뭇잎을 슬쩍 건드리고 지나가는 만남이 아닌 처음과 끝이 같은 수평을 이루는 만남을 소망해보며 나의 인생 후반은 감동으로 물드는 가슴을 느꼈다.

산다는 것이 날마다 위기의 순간이긴 하나 서로서로의 마음을 포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요즘같이 각다분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서가 같고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쪽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래도 아직은 살맛나는 세상이라는 것을, 올겨울도 따뜻한 마음으로 살 것만 같다.

우리는 우리 사이의 모든 벽을 허물고 마음을 나누며 가슴과 가슴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을 주변에 두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닐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