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몽선습’ 저자 소요당 박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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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몽선습’ 저자 소요당 박세무
  • 김동진기자
  • 승인 2021.09.09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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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군 괴산읍 검승리 화암서원에 배향된 박세무의 영정
충북 괴산군 괴산읍 검승리 화암서원에 배향된 박세무의 영정

서당교육의 내용은 강독, 제술, 습자의 세 가지로 강독의 기초적인 동몽교재로 천자문, 통감절요와 함께 서당교육의 주교재로 동몽선습이 사용되었다. 이 동몽선습을 지은 저자는 선비의 고장으로 괴산이 낳은 유학자이자 조선 중기의 문신인 소요당 박세무 선생이다.

그는 동몽선습을 통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글을 읽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어제와 오늘을 알게 하고 자연현상과 인간으로서 도리를 깨치게 하고 누구나 부단히 읽어서 마음의 거울로 삼게하고자 책을 펴냈다.

박세무(朴世茂, 1487~1554)의 자는 경번(景蕃), 호는 소요당(消遙堂), 본관은 함양(咸陽)으로 대대로 괴산지역의 명문가였다. 고조부 박습은 병조판서를 역임했고 아버지 박중검은 성균관 생원을 지냈고 어머니는 담양부사 이관식의 딸이었다.

그는 1516년(중종 11) 생원시에 합격한 뒤 조광조, 김정 등의 신진 사람들과 두루 교류했다. 하지만 이들이 거대한 시류에 휘말려 숙청되는 기묘사화를 겪은 이후 크게 상심하고 실의에 빠져 학문에만 전념했다. 1531년 식년문과에 급제해 외교문서를 담당하던 관청인 승문원에 들어가 헌납을 거쳐 사관으로 재직했다. 하지만 그의 곧은 성정과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여 내뱉는 직언은 당시 최고 권신이던 김안로의 미움을 사 8년 뒤인 1539년에 오늘날의 경상남도 하동인 마전 군수로 좌천되었다가 관직에서 물러났다.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인 괴산으로 돌아온 1541년, 기묘사화 때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벗 조광조의 신원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리는 동시에 집안에 틀어박혀 칩거하며 동몽선습의 글을 썼다. 시대를 잘 못 만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며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암울했을 시절이었지만 마음을 다스리며 초심으로 돌아가 자연과 인간의 도리에 대한 공부에 전념했다. 기득권이 수시로 바뀌는 혼란스러운 시절이었고 그 역시 좌천으로 파직으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지만 좌절하거나 미련을 갖는 대신에 고향 땅 괴산의 아늑한 품 안에서 선비로서 일을 묵묵히 했다.

소요당은 평생 권력과 이욕을 쫓지 않고 한가롭게 노닐며 살겠다는 뜻으로 그의 성정을 알 수 있다. 그는 지방의 수령으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었다. 1537년 연천군 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피폐한 고을을 잘 다스려 부조리를 시정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니 곳간마다 곡식이 가득 차 조정에서 크게 칭찬했던 일화가 전해진다. 

동몽선습은 1544년(중종 39)에 간행되었는데 원래는 그가 자신의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소소한 책이었지만 그 책이 담고 있는 뛰어난 가치를 알아본 제자와 동료 문인들을 통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궁궐의 왕세자는 물론 사림의 제자들이 두루 사용하는 조선시대 유학의 기초 교재로 굳어졌다. 일찍이 조선 중종 대 문신이었던 심수경 역시 동몽선습이 오륜의 내용을 기술하고 역대의 사실을 아우르고 있어 아이들이 마땅히 익혀야 할 책이라고 언급했고 1670년(현종 11)에는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발문을 쓸 정도로 처음 학문을 하는 이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유용한 교재로 널리 인정받았다.

영조는 아이들을 깨우치는 가치와 중요성이 무척 크다는 점을 알고 동몽선습의 언해본을 간행하도록 명하여 널리 보급했고 고종 때에도 역시 세자에게 가르칠 교재 목록 가운데 이 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박세무가 남긴 이 한 권의 책이 가지는 의미는 실로 위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예조판서에 추증되고 괴산의 화암서원에 제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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