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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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22)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9.09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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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었다. 또 부딪혀보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무조건 서울역장실로 향했다. 이 추위에 산골벽지를 찾아 봉사도 가는 어린 여학생들도 있는데 설마 이 물품을 운반하지 못해 봉사활동을 못 간다면 말이 되는가 하는 배짱으로 나를 믿고 서울역장을 만났다. 

“무료 무의촌 봉사에 필요한 의약품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생활용품을 지원해 준 병원들과 적십자사도 있는데 이번에는 역장님께서 저희가 강원도까지 물품들을 운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와주신다면 역장님께서는 산골 마을을 위해 큰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설득하여 결국은 승낙을 얻어냈다. 숙제를 해낸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거기에 우리 임원들의 승차 운임까지 무료로 해주셨고 그 많은 짐을 기차에 옮겨 싣는 것까지 도와주셨다. 모든 고민이 말끔히 해결되면서 드디어 해냈다는 성취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거두2리에 도착했다. 먼저 지원받은 물품을 모두 정리하고 다음날부터 마을주민들에게 의료활동을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우리 임원들이 내심 궁금해했던 적십자로부터 받은 2개의 드럼통을 열었다. 지금까지 구경도 해보지 못한 드레스 모양의 예쁜 잠옷들이 가득했다. 또 다른 한 통에는 비누, 치약, 칫솔 등 생필품이었는데 모두 처음 보는 말 그대로 미제였다. 그것을 본 우리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우리도 예쁜 잠옷을 골라 입어보기도 했다.

우리는 다음날 오전 9시부터 의료활동을 시작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온 것인지 벌써 긴 줄로 늘어서 있었다. 머리가 아픈 사람, 배가 아픈 사람, 화상 환자, 심지어는 냉농양이 얼굴 턱밑에 주렁주렁 매달린 환자까지 서 있었다. 나는 환자의 증상에 따라 약을 나눠주고 화상 환자 드레싱도 해주었다. 문제는 냉농양 환자였다. 턱 주위가 온통 울퉁불퉁하게 냉농양(cold abscess)이 수없이 많은 환자였다. 1968년 당시 병원은 구경도 할 수 없는 산간 벽촌사람들에게 우리는 구세주나 마찬가지였던터라 그 환자를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그 환자를 치료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프로텍트 가운과 마스크 그리고 소독된 글로브를 끼고 메스를 들었다. 그리고 소독 핀셋을 들고 환자 얼굴을 소독한 뒤 메스로 농양을 하나씩 절개하기 시작했다. 노랗다 못 해 연두색에 가까운 고름이 툭툭 터져 나왔다. 다른 임원들은 그 모습을 보고 놀라서 다 자리를 떴지만 나는 끝까지 농양을 절개하고 고름을 배출한 후에 NMC에서 제조한 벤잘코니움(benzalkonium)으로 소독했다. 그러고는 멸균된 거즈로 덮어 완전하게 드레싱을 마치고 환자에게 항생제와 비타민을 싸드렸다. 우리가 머무는 사흘 동안 매일 오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환자가 돌아간 후 임원들이 어떻게 눈 깜짝하지 않고 약 처방과 농양 처치까지 그렇게 잘할 수 있느냐고 놀라서 물었다. 북유럽식 시스템으로 이론과 실습을 병행하는 NMC에서 배운 실력이었다. 환자 상태와 증상에 따라 어떤 약을 처방하는지 훤히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외과 환자도 NMC에서는 학생들이 레지던트와 항상 드레싱을 함께한 경험으로 농양 환자도 치료하고 약 처방도 할 수 있었다. 당시 NMC가 서울대, 연대보다 훨씬 우수한 교육과정과 시설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최고의 간호 교육기관이라는 정평을 실증해 보이는 기회였다.

이렇듯 대한간호학생회의 의료봉사는 큰 호응을 받으며 성공리에 마쳤고 함께 한 임원들은 오래도록 절친한 친구로 남았다.

간호직 공무원 8급 발령을 위한 햇병아리의 시위 주도

1970년 졸업한 나는 병동 근무가 싫어 수술실을 신청했지만 병원에서는 대민관계가 많은 병동 근무를 권유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수술실 근무를 고집했고 결국 내 고집은 관철되었다. 무엇보다 임상은 성격적으로 나와 맞지 않았다. 

수술실에 근무하며 외출에서 밤 9시가 넘어 기숙사에 들어온 어느 날, 침대 위에 메모가 있었다. 들어오는 즉시 사감실로 오라는 메모였다. 바로 사감실에 가자 사감 선생님은 다시 간호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주었다. 밤에 무슨 일인가 하여 급히 간호과로 갔더니 간호과 부과장님 등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계셨다. 

“저를 무슨 일로 찾으셨어요?”

내게 자리를 권하면서 부과장님이 말씀하셨다. 

“유순한 과장님이 이유없이 갑자기 국립보건원 간호과장으로 발령이 나셨는데, 우리가 그냥 있을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이유인즉 유순한 간호과장님이 워낙 집안도 좋고 똑똑하고 자존심 강한 높은 분이다 보니 임상 과장들이 그 꼴을 못 보고 복지부를 동원하여 전보 발령이 갑자기 났다는 것이었다. 유순한 과장님은 유한양행 유일한 박사의 동생이었고 유 과장님의 남동생은 유유산업 유특한 사장, 또 동생은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하는 등의 대단한 집안의 대단한 분이었다. 외모도 당당하고 품위가 있어 의사들도 그분을 깍듯하게 예우했다. NMC에 새로 오는 인턴과 의사들은 항상 간호과장실에 들러 신고 인사를 했을 정도로 존경받는 분이었다. 그래서 간호사들은 무척자부심을 느꼈다.

그런 과장님이 이유도 없이 전보 발령이 났으니 우리 간호사들이 그 부당성을 알고서도 이대로 그냥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었고 그 일을 내가 앞장서 달라는 얘기였다. 

“이제 막 졸업한 제일 막낸데, 어떻게 이렇게 큰일에 제가 나설 수 있어요?”

나로서는 그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 부과장님 역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미쓰 송이 나서서 할 수 없다면, 오늘 얘기는 없는 것으로 하겠다.” 그래도 너무 엄청난 일이었기에 내가 나서는 것은 어렵겠다는 말을 남기고 간호과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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