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37)
상태바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37)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1.10.07 10: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칼로 죽이나 정사(政事)로 죽이나 살인은 마찬가지 입니다

고향으로 향하는 발길
 
한양을 오가는 사이 어느덧 겨울이 찾아왔다. 선조가 자신의 상소를 불태울 정도로 진노하였으니 조헌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옥천 향리로 내려온 그는 후율정사와 각신서당(이지당)을 오가며 후학을 지도하고 찾아오는 선비들과 시국을 논하며 지냈다. 

그가 보은현감에서 물러난 이후 이곳 밤티에 기거하기 시작한 것도 어느새 3년 되었다. 잠시 공주제독에 보임되었으나 이제 옥천은 그와 가족의 온전한 삶의 터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1588년(선조 21년) 조헌의 나이 45세가 되었다. 새해를 맞으며 한 해의 다복을 비는 축시를 지어서 서당 오른쪽에 붙이고 사는 집 오른쪽 문에 하나 오른쪽 안채에 두 편을 붙였다. 새해가 되면 으레하는 일로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고 농사가 잘되어 양식 걱정 없고 자제들은 열심히 학업을 닦으며 효성을 다하는 화평한 한 해가 되기를 바라는 평범한 지아비의 심정이었다. 

다음은 새해를 맞이하여 모든 자제들이 학문을 성취하고 효성을 다하는 어진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서당에 걸은 축시다. 
 
新歲重峯 중봉에 새해가 오니
折節好學 자기를 굽혀 배우기를 쫓아하고
明無人非 밝은 곳에서는 남들의 비난이 없고
幽無鬼責 어두운 곳에서는 귀신의 꾸짖음이 없게 하소서
翩翩冠童 훤칠한 청년과 아이들은
咸使爲己 모두가 위기의 학문을 하고
師聖希賢 성인을 스승으로 삼아 어진 이 되기를 바라며
甘貧勵志 가난을 감내하고 뜻을 굳게 하며
入孝出恭 안에서는 효순하고 밖에서는 공손하며
動罔違禮 행동은 예법에 어긋남이 없고
三餘之功 공부하기 좋은 때에 열심히 배워서
永矢勿替 길이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중봉(重峯):여기서는 후율정사가 있던 용촌리 뒷산을 일컬음

해동이 되자 답답한 심사를 달래고 한동안 뵙지 못한 선대 묘소에 성묘도 할 겸 고향 김포로 향했다. 김포는 성균관에 진학하기 전까지 살아온 정든 곳이다. 비록 부모님은 세상을 뜨셨지만 아직 집과 전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의 본향은 황해도 배천(白川)인데 세종 때에 5대조 환(環)이 강화부사와 나주목사를 지내고  통진에 정착하면서부터 고향이 되었다. 이후에 조부 세우(世祐)공이 인접한 김포 감정동 구두물로 이사를 한 것이다. 

조헌은 어린 시절부터 효자로 소문이 났다. 그는 부모의 명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무릎을 꿇고 대답하였고 한 번도 분부를 거스르지 않았으며 공경하고 섬김이 지극했다. 부모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먼저 손을 씻고 의관을 바로 한 다음에 붓을 들었으며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했다. 이러한 조헌의 효성은 평생 변함이 없었고 친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계모 모시기를 친어머니보다도 더 정성을 다했다.  

조헌이 평생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일화는 이미 알려진 일이다. 하루는 집안 어른되시는 분이 억지로 소고기를 먹이려 했다. 이에 조헌은 눈물을 흘리면서 “나의 아버지께서 임종하실 때에 쇠고기를 잡수고 싶어 하셨으나 집이 가난하여 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차마 이것을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거절하니 더이상 권유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에 그는 부평에 유배되어 있었다. 부평에서 김포 본가까지는 지척 거리였으나 죄인의 몸이라 갈 수가 없었다. 그것이 가장 큰 불효였고 평생을 두고 가슴 아픈 일로 남았다. 그가 유배에서 풀려나 아버님 묘소를 찾았을 때에 임종 전에 그토록 먹고 싶어 하시던 소고기를 해드리지 못했다는 식구들의 말을 듣고는 그후로부터 목으로 소고기를 넘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고향을 찾은 그는 그곳에서 한동안 머무른 것으로 보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