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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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24)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10.07 10: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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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님, 제가 지금 22살밖에 안 되는 나이지만 만일 수퍼바이저들이 단지 저를 그렇게 이용한다고만 느꼈으면 저는 결코 나서서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판단해서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나선 일이니까 그렇게는 말씀하지 마세요.”

그 박 과장님이 후에 원장이 되어 내가 세 번째 NMC에 다시 근무할수 있도록 교수채용에 특혜(?)를 베풀어 주신 학장님이 될 줄은 그때만해도 까맣게 몰랐다.

시민정신 심포지엄
나는 간호과장이 아닌데요

일주일에 걸친 전무후무했던 간호사 시위를 통해 남자들도 감당하기 힘든 저녁 근무, 밤 근무를 하며 24시간 아픈 환자들을 간호해야 하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간호사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대우는 너무나도 불합리하다는 점을 알리고자 했다. 대부분이 20대인 젊은 여성들이 밤 11시 또는 새벽 7시에 퇴근해야 하는 위험에 노출된 직업임에도 이런 여성의 안전과 보호 그에 대한 보상체계 등 처우개선이 전혀 구축되지 않고 있음을 호소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첫 발령 받을때의 직급을 당시 5급을(9급)에서 5급갑(8급)으로 한 단계 승급이라는 결과를 쟁취해 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대학 졸업 후 간호직 공무원 첫발령은 8급을 받고 있는데, 나로서는 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었던 NMC의 간호사 파업 후, 중앙일보에서 연락이 왔다. 「시민특권의식」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하는데 초청하겠다는 것이었고 나는 수락했다. 심포지엄 장소는 이병철 회장 회의실이었고 참석자는 모두 사회적 지위가 높은 분들이라서 22살 된 햇병아리 간호사인 나로서는 당황스러웠다. 사회자는 한승헌 변호사였고 서명원 서울대 교수, 이건호 이대 교수, 김성배 서울시 내무국장, 박영성 화학노조위원장, 서울시 공보주임 등 8명이었다.

쟁쟁한 분들 사이에서 최연소자인 나는 긴장은 되었으나 이내 기죽지 않고 예의를 갖춰 ‘시민정신’이라는 주제에 따라 간호계 대표로서 당당하게 발언했다.

“내가 3학년 때 임상 실습 나갔을 때 국회의원이 1인실에 입원했다. 비상벨이 울리길래 급히 VIP 10호실로 뛰어갔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까 창문이 열려있어 추우니 창문을 좀 닫아달라는 것이었다. 보호자는 옆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6인실에 입원한 중환자 때문에 간호사들은 정신없는데 이런 일로 벨을 누르다니…. 나는 일단 환자 요구대로 창문을 닫아준 후 환자를 향해 ‘이런 일은 보호자한테 얘기할 일이지 간호사를 부를 일이 아닙니다. 간호 인력은 아픈 환자의 간호를 해야지 이런 잔심부름 하려고 있는 전문인력이 아니지 않습니까? 일단 병원에 입원한 모든 환자는 간호사들한테는 똑같은 환자일 뿐입니다. 국회의원님이라고 병원에 입원해서도 차별화된 대우를 받으려고 하시면 병원을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그런 특별대우를 받으시려면 호텔을 가셔야지요’하고 말했더니 그 국회의원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나는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이 후련했다. 아마도 조금 있으면 난리가 나겠지만…

아니나 다를까 내과 과장님이 나를 불렀다. 학생이 어떻게 했길래 VIP가 그렇게 화가 났느냐고 물으시기에 그 상황을 그대로 말씀드렸더니 그 과장님은 웃으며 “학생이니까 그런 말도 할 수 있었겠군. 그런데 우리 병동 VIP 병실 환자라서… 뭐.” 하며 끝냈습니다.

그날 저녁 식사를 하고 병실로 오니 간호사실에 큰 시루떡 상자가 와 있었다. 무슨 떡이냐고 물으니 그 10호실 국회의원께서 미안하다며 보내준 떡이라고 했다. 나는 너무 놀랐다. 그렇게 화난 얼굴이었는데 떡시루를 보내다니…. 나는 10호실로 뛰어갔습니다. “아까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내가 화를 내서 학생한테 미안해요. 그 후 학생 말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학생 말이 틀린 말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내가 부끄럽군. 그래서 내가 미안하다는 뜻으로 떡을 시킨 것이니 맛있게 나눠먹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 순간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그분이 그렇게 멋지고 훌륭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전 저희 간호사들이 파업하는 동안 환자 곁을 비우는 것에 일부 비난도 있었지만, 언론 대부분으로부터 간호사들의 처우에 대해 너무 소홀했다는 사실에는 지지를 받았지요. 인도주의만을 내세워 간호사들에게 무조건 무제한 의무만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시민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요컨대 일방적인 권리 주장과 의무수행은 건전한 시민 정신의 표현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권리와 의무가 병행하면서 평등한 개인으로서 대우받는 제도와 조직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이 점에 있어 인식이 부족합니다. 병원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환자일 뿐입니다. 환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들을 평등하게 대우해야 하지요. 그러나 권력과 금력을 가진 환자들은 은근히 특별한 대우를 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 같은 특권의식은 바로 시민 정신과 정반대의 편에서 있는 것이지요. 환자의 예는 오로지 병원 안에서만 있는 현상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도 볼 수 있는 하나의 의식적 요구로서 우리가 되새겨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서 내가 말한 요지였다. 그러자 참석자들 모두가 호응해 주었다. 심포지엄이 끝나고 나갈 때쯤, 직원이 내게 “송지호 간호과장님이시지요.” 하면서 서명해 달라며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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