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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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맛
  • 박근석 수필가
  • 승인 2021.10.14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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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잠자리서 일어나는 시간은 6시 이전이다. 벽시계를 보니 7시 10분 전, 흥에 겨워 웃고 떠들던 시간이었어도 명절은 명절이었나 보다. 끌어안은 이불에 피로가 고스란히 묻어있다.

세월에 밀려 며느리에서 시어머니가 된 지 햇수로 3년째, 우리 시어머니도 그랬을까? 해를 거듭할수록 나는 내 며느리가 예쁘다. 금쪽같은 딸 이상으로 빠짐없이 기념일을 챙겨서일까. 앙증맞게 실생활을 유지하는 재주가 흐뭇해서일까. 열흘 지나면 추석 명절이다. 보상으로 며느리에게 알찬 밥상을 차려주고 싶었다. 직장생활 하느라 힘들고 나도 근력이 부쳤기에 아들 내외가 오면 늘 외식을 하거나 배달 음식을 시켰다. 전화 한 통이면 삼계탕은 물론 삼겹살, 막창도 바로 먹을 수 있게 구워서 배달되는 세상이다. 그러니 집에서 맛을 보장할 수 없는 먹거리에 기운을 빼고 싶지 않았다. 

마른침을 삼키며 유튜브 채널을 클릭했다. 명절 음식을 검색하니 조회 수가 장난이 아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명절 음식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일단은 갈비찜을 시작으로 마른 오징어전, 깻잎전, 차돌박이 찜, 복음 잡채, 버섯 떡갈비 요리전문가는 물론 일반인의 영상까지 눈이 빠져라 훑었다. 조리법이 가지각색이다. 평소 상차림이 아닌 것에 집중하니 골치가 지끈거렸다. 꾀병처럼 속까지 미식거리며 더부룩했다.

내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나 보다. 퇴근한 남편이 뭔 일 있었냐는 듯 조심스럽게 안색을 살핀다. 떠들어야 스트레스가 풀리는 나,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보통 날과 다르게 저녁 밥상에 침을 튀긴다. 

“미영 아빠, 명절에 우리 뭐 먹지? 내 새끼들 여름 이기느라 힘들었을 텐데 몸보신되는 거면 더 좋고”. “내가 다 생각하고 있으니까, 당신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

남편이 저렇게 확신에 찬 말을 할 때 토를 달면 안 된다.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한다. 의심에 찬 눈으로 상관하면 바로 부부싸움 시작이다. 

“메뉴가 뭔데?” “능이 백숙?” “재료는? 누가, 내가?” “또 저런다. 다람쥐 띠 아니랄까봐. 냉동실에 인삼 있지. 대추 있지. 약재가 수도 없이 많잖아. 능이는 돌아오는 주말에 산타면 되고 재수 없어 못 따면 5일장에서 사면되지. 당신은 마트에서 전복이나 넉넉하게 사면 되네.”

식자재를 냉동고에 사다 놓고 또 사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는 다람쥐 띠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건망증하고 단짝이 된 나, 걸핏하면 놀리듯 땅속에 도토리를 묻어두고 잊어버리는 다람쥐와 비유한다. 어째 됐건 고심했던 가족 모이는 날 주메뉴가 해결됐다. 

해마다 남편은 추석 전에 산에서 능이를 식구가 먹을 만큼 따온다. 운이 나빠 찌개용 잡버섯만 딸 때도 있지만 그럴 때면 5일장에서 용돈을 탈탈 털고 온다. 식구를 위한 마음 씀이다. 그러나 이쯤에서 남편 씀씀이를 한 번쯤 제어해야 했기에 벌레 씹은 얼굴을 만들어 툴툴거린다. “한 해 안 먹으면 죽나 죽어! 소고기보다 더 비싼 걸 꼭 먹어야 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꼭 먹어야 혀, 능이는 말이지, 혈액을 맑게 하지, 심신을 안정시키지, 기관지에도 좋지, 면역력 강화하지, 단백질 분해 성질 있지. 만병을 다스리니 두말하지 마라!”

식감 좋고 몸에 좋은 것은 알지만 텅 빈 지갑을 생활비로 채워야 한다는 것을 잊었나 보다. 올해는 남편이 산에서 능이를 땄기에 5일장 갈 일은 없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처남도 불렀다면서 또 사 오는 게 아닌가. 얼마 주고 샀을까 가격이 궁금했다. 

20일 작은 추석, 장이 제대로 안 설 줄 알았다. 평상시 5일장처럼은 아니어도 시끌벅적하다. 두리번거리지 않고 버섯 있는 곳으로 갔다. 몇 개의 상자가 보인다. 능이도 송이도 싸리도 있다. 사실 더 많은 종류의 버섯이 있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버섯은 그것뿐이라 다른 버섯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마침 등 굽은 어르신이 능이를 사려는지 가격을 묻는다. 귀를 쫑긋 세우니 kg에 130,000원이라 한다. 발길을 돌리며 생각했다. ‘산에 가서 버섯 따는 품을 따지면 뭐….’

좀 있으면 아이들과 내 동생이 도착할 시간이다. 남편의 정이 철철 넘치는 능이 오리백숙이 마당에서 솥뚜껑을 들썩이며 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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