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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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26)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10.21 1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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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합격자도 명동 KAL 빌딩 까지 가서 확인했고 내 이름도 명단에 있었다.

3차 시험으로 영어, 논문, 상식 등 필기시험을 보고나니 왠지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데 시험이 끝나고 나오면서 지원자들끼리 하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들 말인즉, 아무리 공채시험이라 해도 KAL에 높은 사람을 알아야 합격할 수 있다며 누구를 알아서 지원한 거냐며 서로 묻고 있었다. 이전 11기까지는 임원들의 추천으로 입사했고 이번 12기가 첫 공채라지만 그래도 높은 사람 하나쯤은 알고 있어야 합격 가능하다는 말을 들으니 KAL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나로서는 조금 걱정은 되었지만 시험 이후 나는 오히려 배짱이 생겼다. 애써 시험성적이 좋은 사람을 떨어뜨리면 회사가 손해지 내가 손해냐는 배짱이 생겼다. 친구 성희와 영옥이에게 물어보니 각각 전무와 부사장을 안다고 했다. 그러자 다시 걱정은 되었지만 일단 시험결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일주일 후 3차 시험에도 합격했다.

4차 시험은 조중훈 사장, 조중건 부사장의 심층 면접이었고 한 명씩 진행했다. 밖에서 초조하게 차례를 기다렸다. 금방금방 면접이 끝나고 나왔다. 하지만 내 면접시간은 유난히 길었다. 상세한 면접이었고 사는 주소까지 확인하는 것을 보면서 어느 정도 합격을 예감했다. 역시 예상 대로 4차 시험에서도 합격했다.

5차 시험은 김포공항 항공의료실에서 3만 피트 상공 압력에 견딜 수 있는지(두통, 이통 발생유무)를 챔버에 넣고 테스트했다. 4차까지 거치는 동안 1,000명 되는 지원자가 거의 탈락하고 5차 시험 때에는 불과 50명 정도 남았다. 

그리고 최종합격자가 가려졌다. 나는 최종합격자 30명 명단에 들어 있었다. 합격이 되고 나니 걱정이 생겼다. 3년 의무연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두 친구도 합격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의무연한 문제를 해결하면 두 친구도 가능했다. 원장 겸 학장을 겸직하고 계시는 안병훈 원장실을 찾아서 그간의 KAL 입사시험 이야기를 드렸고 의무 연한 3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어렵게 말씀드렸다. 학생 때부터 나를 예뻐하시고 잘 대해주시던 원장님은 바로 교무과장에게 전화하셨다. 

“송지호는 병원 많은 간호사 중에 붙잡아두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놓아주는 게 좋겠다. 그러니 의무연한 문제를 해결해주도록 하시라.”

그렇게 하여 나는 66만 원을 반환하고 퇴직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드디어 내가 간호와 결별을 하게 되었구나 생각하니 한편 후련하고 또 한편은 내가 졸지에 택했던 간호의 길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일 년 반 동안의 병원 생활을 청산하고 1971년 8월부터 새 마음으로 새로운 길을 가게 되었으니 또 다른 세계에서 열심히 살아 보리라 마음먹었다.

입사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는 날 합격자 30명은 대한항공에서 처음 만나 인사도 나누고 자기소개도 했다. 합격자들은 대부분 서울대, 고대, 이대, 숙대, 외국어대 졸업자들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일반인들은 비행기 구경도 못 해보고 살던 시절이라 스튜어디스라는 직업은 이색적인 직업이었다. 그 당시 대한항공 국제선이라고는 한일노선과 베트남이 고작이었고 우리 30명이 공채로 들어가면서 KAL 전체 스튜어디스 숫자가 90명이었으니 지금 7천 명 스튜어디스 수와 비교하면 그 당시에는 스튜어디스라는 직업의 희귀성도 한몫했다. 그렇게 연수를 받던 어느 날 인사과장이 나를 불렀다. 인사과장은 우리 영어 연수도 맡고 있었는데 내게 간호사가 시험을 어떻게 그렇게 잘 보았냐면서 내가 수석합격자이니 앞으로 KAL을 위해 열심히 일해 달라고 했다.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아이러니했다. 간호사가 싫어 대한항공에 들어온 내가 간호사로서 수석 합격한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도도한 J. Song

대한항공에서는 직원들 이름이 그 사람의 영문 이니셜로 통용됐다. 나를 부르는 이름은 J. Song이었고 모든 스케줄 상에도 그렇 게 기재되었다. 나는 우리 12기(공채 1기)의 간사가 되어 대표로 일했다. 연수 기간이 끝나고 OJT(On the job training)가 시작되어 선배들과 동승하여 비행을 시작했다. 비행 수습 기간 동안 기내 서비스와 실제 항공기 구조를 익히고 비상훈련도 받았다. 솔로 비행은 기내 영어방송을 영어 교육담당 과장이 청취한 후 합격해야만 단독 비행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 기에서 가장 먼저 영어 기내방송 테스트에서 ‘Excellent’를 받아 첫 번째로 단독 비행을 시작했다. 부산, 제주, 대구, 광주 등 스케줄이 나오는 대로 생전 처음 단독 비행을 할 때마다 비행기 승객들이 영어방송을 한 후에 영어를 잘한다, 발음이 좋다, 어디서 영어를 배웠느냐 등 칭찬을 해주었다. 유학생이 없던 시절이기에 그런 대우를 받았 던 것 같다.

처음 제주행 비행기에서 시작한 기내 서비스 중 본의 아니게 커피가 든 종이컵이 기울어져 어떤 신사의 상의에 커피가 쏟아졌다. 당황스러웠으나 나는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재빨리 물수건으로 닦아냈다. “공항에 도착해서 숙소에 들어가시면 세탁소에 옷을 바로 맡기시라. 그러면 제가 세탁비를 지불하겠다.”고 하며 숙소 주소를 확인하는 등 성의를 다했다. 그랬더니 그 신사분이 일하다가 실수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며 괜찮다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는 일도 있었다.

또 한 번은 부산행 기내에서 승객들이 왁자지껄하길래 뛰어가 보 니 승객 한 분이 코피를 쏟아 옷에 빨간 피가 배어있었고 주변 승객들은 놀란 채 소란스러웠다. 나는 재빠르게 승객을 화장실로 모셔와 찬물 수건으로 얼굴의 피를 닦아주는 동시에 간호학 강의에서 배운대로 양 쪽 코의 코피지혈 포인트를 손가락으로 압박하여 3~5분 안정시켜 출혈을 멈추게 했다. 그 승객은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코피 사건은 간단히 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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