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만 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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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만 원이
  • 배정옥 수필가
  • 승인 2021.10.2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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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찾아 헤맨 지난 시절, 모두 덮어두고 중년으로 넘어갈 무렵.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다시 또 하나의 꿈을 찾아 고향으로 이사를 하고 부모님의 길에 동승했다. 그 길 위에 꿈은 완성형이 아닌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로 이어지는 미래형과 같다는 걸 실감했다.

우리가 처음 소를 기를 때, 몇 마리 되지 않아 소마다 이름을 지어주었다. 새끼를 한배도 안 뺀 소는 새댁, 한 두 배 뺀 소는 중년 부인이었다. 송아지는 태어나는 순서대로 일돌이, 이순이, 삼순이, 십만 원이 그렇게 네 마리를 며칠 사이로 거듭거듭 낳았다. 처음에는 경험 부족으로 소와 사람이 같이 산통을 했었다. 조용히 먼발치에서 지켜보다 꼭 필요할 때 도아줘야 하는데 같이 힘주고 낳으려고 하면 남편이 막사로 들어가 송아지를 빼주려고 했다. 소가 놀라 허둥대고 벌떡벌떡 일어나곤 했다.

그날은 두 어미 소가 한날 송아지를 낳는 날이었다. 남편도 우사를 비우고 출타 중이었다.

우사에 도착해보니 언제 낳았는지 어미 소 한 마리가 새끼를 혼자 낳아 놓았다. 막사 한 귀퉁이 뽀송뽀송한 갈색 털의 송아지가 체액이 다 가시지도 않은 채 태속의 자세로 눈도 못 뜨고 얼굴을 묻은 채 잔뜩 움츠리고 똬리를 틀고 누워있었다. 그런데 우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막사 칸이라 해야 쇠봉 몇 개 가로질러 칸을 해놓은 것이 전부다. 옆 칸에 있는 어미 소가 “음모오~ 음모오~”울어대며 땀에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입에는 하얀 거품을 물고 광기난 소마냥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빙빙 돌고 있었다. 계속해서 공격할 기세로 옆 칸막이 넘어 새끼 낳은 막사 칸으로 뛰어 넘으려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제 새끼 잃은 어미 소의 울부짓음이었다. 수정처럼 맑고 호수 같은 눈망울이 두려움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옆 칸 어미 소는 유유히 송아지를 ‘웅웅웅’ 거리며 핥아 주고 젖도 먹이고 있었다. 당연히 어미 소와 제 새끼인 줄 알았다. 영문을 몰라 옆 칸으로 왔다 갔다 하며 아무리 살펴봐도 알 수가 없었다. 어미 소 엉덩이만 살펴볼 수 밖에. 진종일 우사 안팎에서 안절부절 새끼 낳기만 기다려도 나오라는 새끼는 나오질 않고 주먹 덩이만 한 똥만 뚝 뚝 뚝… 답답하긴 어미 소도 나도 매한가지였다.

그러다 저녁때가 돼서야 남편이 돌아오고 남은 어미 소 한 마리가 산통이 시작되고 나서야 그 의문이 풀렸다. 오전에 낳은 송아지 삼순이는 무사히 제 어미 소에게 인도되었다. 제 새끼인줄 알고 제 새끼 낳는 것을 잊어버린 어미 소는 반대로 또 애를 태우고 한밤중이 되어도 낳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소도 사람과 같이 양수가 터지고 두 시간 안에 낳지 못하면 위험하다고 한다. 수의사를 부르고 나서야 무사히 새끼를 낳을 수가 있었다. 수의사가 한 번 출장 오면 십만원이다. 그래서 네 번째 태어난 송아지의 이름을 ‘십만원’이라 지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일이 다 끝났다. 온몸이 피로와 한기로 다 젖어 천근만근이었다. 비로소 하늘을 보니 휘영청 밝은 달은 내 꿈인 듯 하늘 한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 하루의 짧은 여정을 떠올렸다. 한나절 동안이라도 눈앞에서 새끼를 빼앗기고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을 어미 소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주인을 잘 만나야 고생을 안 한다는 옛 어른들의 말이 생각이 났다. 말 못하는 짐승도 새끼에 대한 애착심이 저리도 강한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부모를 버리고 자식을 버리는 요즘 사회에 절실한 가족의 중요성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날 밤에 참으로 풍성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짐승들은 냄새로 판단한다고 한다. 씁쓸한 웃음이 나고 잊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그날 일은 아직도 미스터리이지만 금방이라도 두레박 같은 눈물이 철철 흘러내릴 것 같았던 어미 소의 두 눈을 잊을 수가 없다.

삶의 물결을 따라 다시 올라야 할 많은 길 위에 서있는 우리, 현재도 미래에도 모든 순간순간들이 아름다울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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