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역사를 간직한 ‘가산사(佳山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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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역사를 간직한 ‘가산사(佳山寺)’
  • 김동진기자
  • 승인 2021.11.04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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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 22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15호로 지정된 가산사 영정각(좌)과 산신각(우)
2000년 12월 22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15호로 지정된 가산사 영정각(좌)과 산신각(우)

가산사는 720년(신라 성덕왕 19)에 창건된 고찰로 임진왜란 초기에 충청도 일대에서 의병을 모아 혁혁한 공을 세운 중봉 조헌과 승병장 영규의 위패를 모신 호국사찰이다.

이 사찰은 충북 옥천군 안내면 답양리 산211번지 채운산 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병자호란 이후에야 마을이 형성될 정도로 오지였고 그 규모 또한 크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가산사는 역사기록을 볼 때 주목을 받지 못했고 사세도 미약했지만 임진왜란 당시 풍전등화와 같은 민족을 구하기 위해 많은 의승군과 의병이 훈련했던 호국정신이 깃든 사찰로 부상했다.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영규대사는 서산대사가 승군의 총책임을 맡기 전 자발적으로 승군을 조직한 최초의 승병장이었다. 가산사 일대는 이런 승병장 영규대사와 의병장 조헌 선생이 의승군과 의병을 조련하고 군영으로 사용했다. 영규대사와 조헌 선생은 힘을 합해 청주성을 탈환했지만 금산전투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 순절했다. 그 역사적 의의가 큰 곳이라 가산사에서는 영정각과 산신각을 짓고 영규대사와 조헌 선생의 영정을 봉안했는데 지금은 위패만 모셔져 있다. 

1910년 일제의 강점 이후 이곳이 항일운동의 기지가 될 것을 우려한 조선총독부에서 영정을 강제로 빼앗고 법주사의 말사로 지정했다. 

가산사 내에 있는 영정각과 산신각은 2000년 12월 22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15호로 지정됐다. 하지만 아미타불좌상은 1980년 11월 13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됐다가 1991년 5월 5일 가산사 내 화재로 소실돼 1992년 10월 23일 문화재 지정이 해제됐다.

절 내의 영정각 지붕의 용마루 망와에 쓰여 있는 명문에는 1694년(숙종 20)에 제작된 기와를 사용했다고 기록돼 있다. 1695년(숙종 21)에 건립된 영정각은 건축의 형태는 정면 1칸, 측면 1칸 겹처마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매우 작은 규모지만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영정각 뒤에 있는 산신각은 산신탱화를 봉안하기 위한 집으로 영정각과 같은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신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624년(인조 2) 극락전을 중건할 때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산사 극락전은 1624년 중건할 때 지었으며 화재로 소실되기 전까지 내부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7호인 아미타불좌상이 있었다. 아미타불좌상은 향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90cm이다. 복장에서 나온 ‘복장기(腹藏記)’에 따르면 1624년 경상북도 김천시 쌍계사(雙溪寺) 북암(北庵)에서 조성되었다고 한다. 복장에서는 이밖에 유물로 ‘묘법연화경홍전서(妙法蓮華經弘傳書)’1권 등 6점의 문헌이 나왔다. 이들 문헌은 1477년(성종 8) 전라북도 완주군 화암사(花巖寺)에서 간행한 것으로 조선초 서지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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