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히 순국한 ‘이의정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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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히 순국한 ‘이의정 장군’
  • 김동진기자
  • 승인 2021.11.04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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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군 양산면 봉곡리에 있는 ‘이의정 장군’의 묘소
충북 영동군 양산면 봉곡리에 있는 ‘이의정 장군’의 묘소

고려 문인 이규보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히 순국했던 이의정 장군. 그의 묘역은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봉곡리에 있으며 1986년 4월 28일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6호로 지정됐다.

이의정(李義精:1555∼1593)은 조선시대의 무신, 자는 의중이고 본관은 하음으로 옥천에 거주했다. 고려 후기의 문인 이규보의 8대손, 예조판서를 지낸 장(墻)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충순위 선전관을 지낸 이문웅, 어머니는 부윤 박임현의 딸 밀양 박씨이며 17세에 원주 이씨와 결혼했다.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29세인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여 예빈시를 거쳐 보령현감으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행재소가 있는 의주에 가려 했으나 길이 막혀 진주성으로 가서 참전했다. 1593년(선조 26) 6월 경상우도의 중심지이자 호남의 길목인 진주성에는 남해안에 집결했던 왜군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왜군들이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총공세를 감행했던 것이다. 

이 장군은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40명의 전투대장 중 한 명으로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黃進) 등을 보좌하며 최후까지 싸우다가 왜군이 진주성 남문을 깨트리고 들어와 성을 함락하자 조복을 입고 북향사배한 후 촉석루 아래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했다. 이때가 6월 29일이었다. 

일찍이 진주로 가는 길에 박응창을 만나 옷을 벗어주며 집안 사람에게 보내 이미 순절할 각오를 하였음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1993년에 충북대 박물관에서는 영동군 양산면(당시는 옥천군) 가곡리 양산 마총에 대한 발굴 작업을 벌인 적이 있었다. 이 마총은 직경 5m 높이 2m의 크기의 석실 말무덤으로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이의정 장군의 말이 그의 장삼을 물고 천리 길을 달려와 이곳에서 죽자 이 장군의 부하들이 말의 묘를 썼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곳이었다. 

이 말 무덤은 전설과 달리 서기 7세기 신라계 돌방무덤(석실분)으로 판명됐지만 그의 애마를 묻은 곳이라는 전설이 의탁된 것은 그만큼 그의 장렬한 죽음을 애석해했던 민심이 이 고을에 면면히 내려왔음을 짐작케 한다.

이 장군의 묘소는 그의 집이 있던 후산의 남향 기슭에 있다. 신도비는 1796년(정조 20) 이조참의 송환기(宋煥箕)가 짓고 강택중이 새긴 것을 1801년(순조 1)에 세웠다. 그는 후에 진주 충렬사(彰烈祠)에 봉안됐으며 병조참의에 추정됐다. 

1722년(경종 2)에 정려각이 내려졌다. 정문(旌門)은 이의정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충신증통정대부병조참의 행조산대부 수보령현감 이의정지문(忠臣贈通政大夫兵曺參議 行朝散大夫 守保嶺縣監 李義精之門)’ ‘경묘 임인 명정(景廟 任寅 命旌)’이라고 돼 있다. 묘역 앞에는 1996년에 건립한 사당인 충의사가 있다.

묘소와 신도비, 정려각은 모두 당시 옥천군이었던 지금의 영동군 양산면 봉곡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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