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양반가 육아일기 ‘양아록’의 저자 묵재 이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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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가 육아일기 ‘양아록’의 저자 묵재 이문건
  • 김동진기자
  • 승인 2021.11.1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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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가 유일한 육아일기인 묵재 이문건의 ‘양아록’.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3호로 지정됐다.
조선시대 양반가 유일한 육아일기인 묵재 이문건의 ‘양아록’.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3호로 지정됐다.

조선시대 을사사화의 희생양, 문신이자 서예가인 묵재 이문건 선생. 조선시대 유일한 양반가문의 육아일기라고 불리는 ‘양아록’의 저자이며 중종 때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이문건(李文楗, 1494년~1567년) 선생은 자는 자발(子發), 호는 묵재(默齋)·휴수(休叟)·검재(黔齋), 본관은 성주(星州)다. 조선전기 승정원주서, 이조좌랑, 승문원판교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부친은 승문원정자 이윤탁, 어머니는 신회(申澮)의 딸이다.

형 이충건과 더불어 조광조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1513년 사마시에 합격했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화를 입자 그 문인들이 화를 염려하며 조상(弔喪)하는 자가 없었으나 두 형제는 의리를 지켜 상례(喪禮)를 다했다. 이로 인해 미움을 받아 기묘사화를 주도한 남곤, 심정에 의해 1521년 안처겸의 옥사에 연루되며 형 이충건은 청파역에 정배되었다가 사사되고 이문건은 낙안에 유배됐다.

1527년 사면돼 이듬해 1528년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했다. 승정원주서, 승문원박사를 거쳐 사간원정언, 이조좌랑에 이르렀는데 이때 이전의 혐의로 대간의 서명이 거부됐으나 김안로의 협조로 관직생활이 순탄했다. 1539년에는 장령을 역임하며 기강의 확립에 힘썼고 그 뒤 통례원우통례를 거쳐 승문원판교가 됐다. 중종의 국상을 맞아서는 빈전도감 집례관으로서 대사를 무난히 처리했으며 명족, 시책문, 신주를 모두 썼다. 1545년 통정대부 승정원좌부승지에 올랐으나 을사사화 때 조카 이휘가 ‘어진 임금을 선택하여 세워야 한다’고 한 말로 문초를 받자 이에 연루되어 관작을 삭탈 당해 성주에 부처된 후 23년간의 유배생활로 생을 마감했다. 그때가 1567년으로 향년 74세. 괴산의 화암서원에 제향됐다.

집안은 과거에 급제하여 대대로 명문가였으며 성품이 근후했고 효성이 지극했다. 유배생활 동안 경사(經史)와 시문에 힘썼으며 특히 주역을 좋아했다. 그의 시문은 당대의 사림인 성수침, 이황, 조식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중종 때 명필로 필법 조항에 이름이 올랐으며 글씨에 능하고 병풍과 족자를 잘 꾸몄다고 하며 ‘해동호보’에는 그림에도 능했다 했다. 송시열이 지은 행장에 “널리 여러 글씨에 통달하고 필법이 한 시대에 뛰어나서 당시의 같은 또래들이 그를 추대하여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글씨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초서나 해서를 가리지 않고 당장 휘둘러 써주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는 귀하게 얻은 손자가 사대부로서 예법을 지키고 열심히 학문을 닦아 입신양명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묘사해 책으로 남겼는데 이 책이 육아일기인 ‘양아록’이다. 

저술로 ‘묵재집’, ‘묵휴창수’, ‘묵재일기’가 있다. ‘묵재일기’는 1535년에서 1567년까지 쓴 방대한 분량의 일기로 초서로 썼다. ‘묵휴창수’는 교유하던 유림 제현의 화답시를 묶은 친필본이다. ‘이윤탁안인신씨묘갈(李允濯安人申氏墓碣)’과 ‘이강묘표(李鋼墓表)’의 글씨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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