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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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30)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11.18 1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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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카드를 받아 먹지에 놓고 문질러대면 카드 전면이 먹으로 나오는 카피 한 장씩을 떼어 보관하면서도 이까짓 먹지로 복사한 종이 한 장이 어떻게 그 큰돈을 대신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았었다. CIO에 가서도 평 생 친구가 된 동갑내기 이윤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조양호 회장 부인인 이명희 씨의 사촌 언니이다. 그때 그 친구의 작은 엄마(이명희씨 어머니)가 가끔 사무실에 들르곤 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후에 조양호·이명희 커플 결혼식에도 초대되는 등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되었다.

CIO로 가면서 내 호봉은 남자직원보다 1호봉 더 높여주었다. 그야말로 특별대우였다. 그 시절에는 여자직원은 남자직원보다 적은 월급을 받는 것이 통례였던 때다. CIO에 근무하는 동안에도 혹시 CIO 업무가 맘에 들지 않으면 여직원으로서는 처음으로 마케팅 부서에 근무하게 해 줄 수도 있다는 제안도 받았다. 그러나 마케팅이라는 개념도 몰랐던 무지한 나는 고된 영업사원만 보아왔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거절해버렸다. 

회사에서는 나를 붙잡아 두고자 꾸준히 관심을 보여주었다. KAL 영문판 해외 홍보 책자에도 CIO 출입구에서 촬영한 내 사진을 실었다. 그 뿐만 아니라 나는 당시 KBS 9시 뉴스 광고시간에 나가는 대한항공 광고에도 출연했다. 세계로 뻗어가는 대한항공을 토픽으로 하여 미국인이 대한항공에 LA 비행기 예약을 하는 전화를 하면 내가 그 예약전화를 받고 LA행 비행기 예약을 해 주는 화면이 나가는 광고내용이었다. 이 광고는 KAL에서 LA 운항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처음으로 태평양노선을 시작한 대한항공으로서는 세계로 뻗어가는 대한항공의 이미지를 홍보하는 중요한 홍보였다. 

그 당시에는 내가 그런 대우를 받는것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 그런 것이려니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 해보면 나는 대한항공으로부터 과분한 예우를 받았던 것 같다.

네가 원하는 직장이 어디냐는 육 여사님 말씀에…

국제사무소에 근무하는 동안 미국, 프랑스, 캐나다, 홍콩, 일본 등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클라이언트로 만나면서 해프닝도 많았다. 결혼은 생각지도 않고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해서 멋진 인생을 살리라는 꿈을 가지고 살고 있을 때이다. 1년 이상 만나면서 친근해진 그레이하운드 부사장 명함의 미국인, 다이아몬드 상을 한다는 홍콩인, 파리에서 사업을 한다는 프랑스인 등이 줄기차게 프러포즈하여 애를 먹는 해프닝도 있었다. 

한국인보다 외국인을 상대로 오해 없이 거절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KAL을 자주 이용하는 고객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일들로 그런대로 하루하루 지내고는 있었지만 내 맘속에는 항상 2% 부족한 것이 있는 듯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육영재단 어린이 회관 관장으로 계시던 작은아버지를 만났다. 

나는 작은 아버지께 처음으로 대한항공 입사에서부터 연좌제로 인해 여권이 나오지 않아 국제선을 포기했던 일, CIO에 근무하게 된 사연 등을 말씀드렸다. 작은아버지께서는 그러잖아도 내 신원조회로 인해 청와대 육여사 님과 전화하며 내 걱정을 하셨다며 다시 육 여사께 전화하셨다. 

육 여사는 아버지와는 고종사촌 동생이고 작은아버지에게는 사촌 누나가 되는 사이로 나에게는 5촌 당숙이시다. 

아버지께서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께 누가 될까 봐 북한에서 탈출하신 후 장기수로 복역 중이셨기에 육 여사께서는 그 점을 미안해하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육 여사와 사촌 간이기 때문에 청와대에서 봐줘서 사면 됐다는 오해를 받을까 봐 육 여사께서는 전혀 관여하지 않으셨고 아버지께서도 육 여사께 민폐를 끼칠까 봐 오히려 조심하고 지냈다. 그런 관계로 나까지 아버지의 연좌제 때문에 국제선도 포기했다는 말을 전화로 들으시고는 육 여사께서 “지호가 국제선을 타면 오히려 힘들고 큰 발전은 없을 테니까 무엇을 꼭 하고 싶은지 말하면 내가 그것은 한 번 도와주겠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전화로 들으시고 내게 물으셨다. 

“너는 무슨 일을 하고 싶으냐.”

“누님께서 물어보시니 네가 하고 싶은 일을 말해봐라. 그러면 내가 다시 전화를 드리기로 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나 가고 싶은 직장이 있으면 시험을 치러서 들어가면 되지 구태여 아주머니께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또 나는 나대로 주위에서 청와대 빽으로 들어왔다는 주홍글씨를 달고 직장생활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 그런 도움은 필요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드렸다. 작은아버지는 누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셨는데 거절하는 것은 좀 죄송한 마음이 든다고 하셨지만 나는 결코 내 일은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으니 누구의 도움도 받고 싶지 않다고 다시 말씀드리고 나왔다. 

6·25 전에 아버지가 대전에서 사업체를 여럿 갖고 부유하게 살 때 육 여사님 바로 밑에 동생되는 용수 아저씨가 대전고등학교 재학할 당시 우리 집에서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육 여사께서 우리 집에 자주 오셔서 사촌 간이지만 아버지와는 특별히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실제로 어머니도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6·25 전쟁 때 어머니가 아버지와 헤어져 할머니 댁으로 피난 가는 도중에 옥천 육 여사 생가에 들리셨다고 한다. 그때 육 여사께서 뛰어나오시면서 나를 받아 안고 “그 영리한 지호 군요.” 하면서 무척 반가워하셨다는 것이다. 

손수 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아 와서 “언니 다리 아픈데 따뜻한 물에 좀 담그시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를 통해 육 여사님의 인품이 얼마나 겸손하고 훌륭하신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누구의 도움을 받고 취직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언제나 남의 도움 없이 내 일은 내 힘으로 해결 하며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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