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기획특집 ‘아아, 어찌 우리 잊으랴! 그날을’ - 잊혀져 가는 무장간첩 소탕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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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기획특집 ‘아아, 어찌 우리 잊으랴! 그날을’ - 잊혀져 가는 무장간첩 소탕작전
  • 손채화
  • 승인 2021.11.18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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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채 화(70), (전)옥천군 기획감사실장, (전)옥천노인장애인복지관장, (전)옥천향토사연구회장
손 채 화(70), (전)옥천군 기획감사실장, (전)옥천노인장애인복지관장, (전)옥천향토사연구회장

 

2명의 무장간첩 군북면 추소리에 출현
경찰과 주민 합동으로 사살
‘무장간첩 소탕 전적비’ 건립해야

6·25사변 이후 옥천군 관내에서 무장간첩이 출현하여 소탕작전을 벌인 역사적 사실이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 사건은 지금부터 54년 전인 1967년 8월 18일 옥천군 군북면 추소리에 무장한 괴한이 출현하였고 이튿날 군북면 석호리 진걸마을에서 소탕작전을 전개하여 무장간첩 2명을 사살한 대간첩작전이다. 

이들 무장간첩들은 중요시설 파괴 및 요인암살의 임무를 띠고 침투한 북한 민보성 예하 제283군부대 소속 김복성(충남 공주 출신) 외 1명으로 같은 해 5월 28일 강원도 삼천시 원덕 해안으로 상륙하여 경북과 강원도의 경계선을 이용하여 충북지역으로 잠입한 무장간첩 중 일부로 판명된 사건이다. 

이 글은 2009년 7월 10일자 한 지역신문에 기고하여 게재된 바 있으나 당시 기고문에 일부분 보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 옥천향수신문에 재기고를 하기로 했다. 그러한 이유로는 우리 고장에서 발생한 무장간첩사건을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우리가 겪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사라질 것 같은 위기감 때문이다. 보충자료는  옥천경찰서와 육군 제111연대 1대대에서 보관 중이던 문서를 근거로 하고 당시 전투에 직접 참여하였거나 참관한 자의 증언과 필자가 직접 본 내용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했다.

무장간첩의 출현

1967년 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18일 오전 8시, 옥천군 군북면 추소리에 거주하는 주민 유정현(당시 35세, 사망)씨가 속칭 골남골에 풀(일명 보리풀)을 베러 갔다가 군 작업복에 농구화를 착용하고 수류탄과 권총으로 무장한 거동수상자 2명이 나타나 수류탄을 보이며 안전핀을 뽑는 등 위협을 가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 등에 지고 있던 지게와 낫 등을 집어던지고 ‘나 살려라’ 도망쳐 같은 마을에 사는 유재흠(당시 20세, 사망)씨에게 이 사실을 전달했다. 유 씨는 당시 마을에는 전화기가 없던 시절이라 자전거를 타고 5km 거리의 군북지서(현 파출소)에 신고를 했다. 

신고를 받은 옥천경찰서는 경찰 27명과 때마침 지역 내 경부고속도로 개설에 참여하고 있던 육군 공병 제702중대 1개 소대와 함께 추소리 골남골로 출동하여 수색정찰을 펼쳤으나 아쉽게도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동시에 무장간첩이 출현하였다는 소문은 옥천읍과 군북면을 중심으로 옥천군 관내에 삽시간에 퍼져 주민들이 불안에 떨었다. 또한 당일 밤을 우려하여 출현지역 인근 마을마다  2~4명의 경찰관이 배치되었다. 

이튿날인 8월 19일 새벽 4시 30분, 군북면 석호리 진걸 마을의 박노헌(당시 44세, 사망) 씨가 어깨에 삽을 둘러메고 벼 논의 물꼬를 보러가는 중 길가 옆 낙엽송이 우거진 산속에서 2명의 거동수상자가 냄비에 옥수수를 삶는 수상한 광경을 목격하고 동네에 배치된 경찰에게 신고를 했다. 군북면 추소리에서 이곳으로 이동한 무장간첩임이 틀림없었다.

작전 전개 

신고를 접수한 경찰관 4명과 마을이장 전광덕(당시 38세, 사망) 씨, 마을주민 손흥연(당시 35세, 사망) 씨, 신고자 박노헌 씨 등 7명이 현장에 도착하여 여명의 새벽에 주위를 살펴본 결과 무장간첩임이 확인되어 소탕작전이 시작되었다. 4명의 경찰관과 2명의 무장간첩 간 교전소리는 마을주민의 새벽잠을 일깨웠다. 

당시에는 전화기가 없고 스피커에 유선이 연결되어 라디오를 듣던 시절이라 이 사실을 전파하기 위해 마을 이장인 전광덕 씨는 유선방송시설이 설치된 1.5㎞ 거리의 군북면 석호리 함티마을(군북초교 소재)까지 달려가 인근마을에 배치된 경찰관에게 유선방송으로 알려졌으며 얼마 후 무장간첩 출현지에 경찰관이 총집결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 마을의 젊은 남자들도 몽둥이를 들고 마을 어귀로 나오라는 청년회장의 전갈이 있었다. 무장간첩이 출현하여 경찰과 교전 중이므로 산 능선에 숨어서 도망가는 무장간첩을 관망하라는 경찰의 협조 당부라고 했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필자도 몽둥이를 들고 나가 다른 친구들과 산 능선 바위 밑에 숨어서 소탕작전이 전개되는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여름방학이라 현장에 직접 참관할 수 있었는데 가슴이 두근두근 신들린 사람처럼 몸이 떨리고 두려움에 오줌이 지릴 정도였다. 

이윽고 2차 작전으로 경찰관 4명이 무장간첩이 숨어 있을 곳을 향하여 집중사격을 해댔다. 이때 길을 안내한다고 앞장섰던 손흥연 씨가 간첩이 쏜 실탄에 다리를  맞아 쓰러지는 등 불꽃 튀는 교전이 벌어졌다. 잠시 후 무장간첩 한 명이 ‘김일성 수령님 만세’를 외치고 수류탄을 던지며 뛰쳐나와 온몸으로 덮어 자폭하고 말았다. 동시에 부연먼지와 함께 1.5ⅿ 높이로 몸이 뜨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에 경찰관이 소지한 무기는 칼빈 소총이었고 무장간첩은 수류탄과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무장공비의 총소리는 ‘핑핑’하는 날쌘 소리였으나 경찰관의 칼빈 소리는 ‘따각따각’하는 무딘 소리로 확연히 다르게 들렸다. 그리고 경찰관은 수류탄이 없어서 동네에 도로개설용으로 확보하고 있던 TNT(일명 깡)를 터뜨려 밭 가장자리의 도랑을 덮고 있던 수풀을 헤칠 수 있었다.

무장간첩 두 명 중 한 명은 숲이 헤쳐져 도랑에 쓰러져 있는 것을 작전 중이던 경찰이 발견하여 자폭한 것이 확인됐으나 다른 한 명은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경찰은 ‘작전종료’를 소리쳤다. 이 무렵 동쪽 하늘에는 불그레한 아침 해가 뜨고 있었고 이때 작전에 참가한 경찰관은 10여 명이었다.

작전종료 소리와 함께 경찰관과 마을 주민들은 무장간첩 시신이 있는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필자도 현장에 가보니 자폭한 한 명은 복부가 없이 내장이 흩어져 인근이 핏물로 얼룩져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얼굴에 총알을 맞고 뒷머리로 관통하여 숨져있었다. 

처음 발견된 곳을 가보니 냄비에 옥수수가 들어 있고 배낭, 무전기, 나침판, 지도 등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서 사살된 것이다. 

진걸 마을 앞 강변에는 막지리 장고개 마을과 안내면 답양리 주민들이 이용하는 나루터가 있었다. 당시에는 금강물이 불어 흙탕물이라 무장간첩이 도강할 수 없어 이곳에서 머물다가 발견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얼마 후 옥천경찰서장이 도착하여 경찰관들을 위로와 격려를 했다. 이후 공수부대원 20여 명이 도착하여 아쉬움을 표한 후 돌아갔다. 그리고 상부로부터 군북지서장 책임 하에 시신 2구를 처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주민들은 강 건너 막지리 공동묘지에 시신을 묻기로 하고 마을 주민 몇 분이 배에 싣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배에 묶고 가던 시신 2구 중 1구가 물살이 세서 시신을 묶고 있던 새끼줄이 그만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결국 1구만 묻고서 상부에는 이상없이 매장하였음을 보고했다고 한다. 

시신의 재발견

대간첩작전이 있은 지 3일 후인 8월 22일, 필자는 친구 2명과 함께 강변 나루터에서 놀고 있었는데 한 친구가 강물에 송아지가 떠내려 오는 것 같으니 잘 살펴보자고 했다.(당시만해도 장마가 지면 가끔씩 송아지가 물에 떠내려오곤 했었다) 얼마 후 정말로 누런 송아지로 보이는 무언가가 떠내려 오고 있었다. 물 흐름이 잔잔한 곳에서 건지려고 물길을 따라 내려갔다. 

속칭 큰골 앞에서 강물 흐름이 느려져 우리 셋이서 폭 40여m의 강물을 수영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물체를 바라보니 송아지가 아니라 사람 시체를 가마니로 싼 것이 일부 벗겨져 물고기들이 떼로 몰려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무장간첩의 시신인 것 같았다. 너무도 놀란 우리들은 헤엄을 쳐서 강을 건너오는데 마치 물귀신이 다리를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느낌에 심장마비가 올 지경이었다.

동네로 돌아온 우리 셋은 시체 발견을 자랑거리인양 어른들한테 말씀드렸더니 떠내려가면 그만인데 신고를 하여 귀찮다는 식으로 꾸지람만 들었다. 해당 시체는 매장하기 위해 물 위로 이동 하던 중 새끼줄이 끊어져 사라진 그 시체라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았다. 그리고 그 시신이 부패되어 물 위로 떠오른 것이라고 했다. 동네 이장은 주민 몇 사람과 함께 다시 시신을 인근에 묻고 돌아왔다.

포상 및 전과

당시에는 ‘간첩을 신고하면 20만 원 상금 탄다’라는 멸공구호가 한창 나부낄 때이다. 최초 신고인은 추소리 주민이고 사살을 하게 된 결정적인 신고는 석호리 진걸마을 박노헌씨이므로 듣기로는 20만원을 가지고 4:6의 비율로 포상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간첩신고 보상금을 수령한 박노헌 씨는 무장간첩 소탕작전 이후 혹시 다른 간첩의 보복을 우려한 나머지 불안한 마음으로 마을에서 2년 정도 더 살다가 대전으로 이사하였다. 

군북면 석호리 진걸 마을에 배치되었던 경찰관은 4명이었다. 소탕작전에 공을 인정받아 모두 순경에서 경사로 1계급 특진(당시에는 경장계급이 없었음)하는 영예를 안았다. 전과로는 무장간첩 2명 사살에 노획품으로 권총 2자루, 수류탄, 나침판, 무전기, 지도 등 11점이었다. 다행히 우리 측 피해는 없었다.

54년 전 우리 국민에게 부여된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무장간첩 출현을 신고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맨손으로 경찰과 함께 소탕작전에 참여했던 어른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 또한 몽둥이를 들고 바위틈에 숨어서 무장간첩의 도주로를 관망하면서 소탕작전을 직접 눈으로 보았던 젊은이들은 이제 70~80세 노인이 되었다. 그래서 이 역사적인 사실이 누군가에 의해 기록으로 남겨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오늘날 한반도 정세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로 세계가 주목하고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북한의 도발로 국내·외적으로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는 오늘날, 위 소탕작전에서 보여준 국가관과 투철한 사명감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지 되묻고 싶다.    

옥천은 지리적 여건으로 보건데 경부간의 중심에 위치해 있어 국도․철도․고속도로 등이 한 곳에 묶여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동시에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중요시설 파괴와 요인암살의 임무를 띠고 남파한 무장간첩이 우리 지역에서 출현된 것도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치열한 대간첩전투가 벌어진 사건의 역사는 기록으로 보존하고 후손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역사적인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 ‘무장간첩 소탕 전적비’라도 건립하여 현장을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되기를 제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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