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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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을 하면서
  • 김용현 법학박사, 시인
  • 승인 2021.11.18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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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어떤 모델이란 게 없었을 테니 그가 가졌던 어떤 이상을 형상화하는데 꽤나 힘이 드셨을게다. 그런데도 삼라만상을 만드시고 거기에다 조화와 미까지 주셨으니 존경받아 마땅하다.

눈이라도 포슬포슬 내리는 한가한 휴일이면 톱니바퀴처럼 틈새없이 돌아가던 일상에서 벗어나 명상이라도 하려고 조용히 밖을 보다가 유리창에 형성된 성에를 보고 그 자연의 아름다운 아라베스크 무늬를 도안(圖案)으로 연결해 본다.

언젠가 보았던 백제 연와(煉瓦)에서 발견한 문양의 편린과 이슬람 성당 돔에서 새겨진 무늬들을 모아서 선과 공간의 조화를 생각하며 마치 내 생애의 설계라도 하는 듯이 조심스럽게 모눈종이에 그려본다.

몇 번인가의 수정 끝에 그래도 잘 흐른 선을 발견하고는 사회 초년생들이 자기의 삶을 건 직장을 선택하듯이 나무를 고른다. 마디카, 피나무, 구루미, 은행나무 아니면 흑단목…

어떤 나무는 무늬가 좋고 어떤 나무는 색상이 현란하며 어떤 나무는 향기가 좋고 또 어떤 나무는 딱딱하여 칼을 잘 받지 않지만 천년을 약속하고 어떤 것은 부드러워 많은 것을 만들 수 있다. 밑그림의 특성에 맞추어 나무를 선택한 뒤 토막을 낼 때는 늘 겪는 시행착오 때문에 망설이곤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주어진 것은 얼마인가.

나는 어디까지 나아가야 하며 물러설 때는 언제인가.

우리의 삶은 각본도 연습할 기회도 없이 그저 자기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스스로 내렸던 결정에 따라 대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내화질(耐火質)의 유리를 통해 나오는 난로의 온기로 느슨해진 근육을 잘 갈아진 조각도의 예리함에 추스르며 칼을 든다. 창칼로는 선을 긋고 반월도(半月刀)로는 파내고 평도(平刀)로는 아우르고 마음에 낀 때라도 벗기는 듯 나무를 깎는다.

부처님의 얼굴을 살찌게 하고 여위게 하는 것은 석수장이의 맘이라지만 동해의 푸른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천년을 흘러온 석굴암 본존상의 어깨선과 바다처럼 땅처럼 하늘처럼 모든 것을 감싸 안아 버릴 듯한 잔잔한 미소를 깎아낸다는 것은 무슨 인연이라도 닿지 않으면 안된다.

유한(有限)에서 오는 절망과 식자(識者)로서의 절제, 부족함과 한계성.

조각을 하다 보면 거기에 몰입되고 상상은 나래를 펴 나비처럼 나른다. 칼을 통해 전해 오는 목질의 감촉은 긍정적인 삶에서 느끼는 것처럼 참 좋다. 적도의 뜨거운 밀림 속에서 촌 새악시처럼 숨어 살다가 남지나해 푸른 파도에 씻기며 화물선 꽁무니를 따라온 마디카의 목질은 여인의 속살같이 부드럽다.

주목의 향기가 참 좋다. 객지로 떠돌다가 찾아가 누운 고향 뒷산의 풀 내음이다. 아버님 어머님 산소 옆 잔디에 누워 쳐다보는 하늘의 맑음이다. 만지고, 파내고, 깎고…

을씨년스러운 겨울 정원에 흰 눈이 소복이 쌓이고 짧은 겨울 해가 저물 때쯤 사지(砂紙)로 마지막 손질을 끝내고는 지나온 생을 관조하듯 물끄러미 바라본다.

항용(恒用) 우리는 기대치와 성취도의 간극에 서게 된다. 나는 이 조각을 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는가. 나는 이 조각을 작품이라 할 수 있는가? 자기의 삶은 자기가 설계하고 스스로 완성하는 것이며 그 평가는 조각품에 대하여 제3자가 평하듯 관 뚜껑을 닫는 순간 세인들이 평가한다. 결국, 걸작(傑作)과 졸작(拙作)은 조각가의 책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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