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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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44)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1.11.25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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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운(國運)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관리들이 함부로 법을 무시하고 뇌물로 형벌을 결정하는가 하면 북쪽 이주민을 돌려보내라는 조정의 명령에 의해 자행되는 억울한 백성들의 원성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조헌은 억울하게 고통받는 백성들의 실상을 이렇게 말한다.  

“지난 가을 북쪽 사람을 쇄환(刷還 도망친 자를 다시 돌려보냄)하라는 명령이 계셨는데 죄수가 많아서 옆집까지 합병하여 옥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구속의 대상이 양민에게만 그치지 않고 지위가 높고 행동이 점잖은 사람의 자제까지도 형장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민(移民) 기피자를 한 사람 재워 보냈다 하여 온 가족이 북방으로 이민을 가야 했고 한 골육의 정을 끊기가 어려워 잠깐 동안 쉬어가게 했다가 그 피해가 수십 호의 이웃에 미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한 사람이 옥에 있음으로 해서 만인이 업(業 )을 폐(廢)한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감방의 고초는 하룻밤이 일 년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제 하소연할 곳이 없는 백성을 옥에 가두어 겨울을 지내고 봄이 와도 오히려 풀어주지 않아 만물이 다 생기에 차 있지만 이들은 사심(死心)이 차 있습니다. 한 죄수가 경기감옥에서 죽으니 그의 친족 가운데 고관의 지위에 있는 분이 있어 옷을 보내어 염하려고 하니 그곳 수령이 어사에게 보고하여야 한다고 하여 공문을 발송하니 그 공문이 갔다 오는 동안 한 달을 거적대기로 시체를 덮어 놓았고 또 한 아이가 호옥(湖獄)에서 죽었는데 그 시체를 옷으로 가리지도 않고 파묻지도 못한 채 여러 죄수 중에 그대로 놓아둔 채로 10일을 지냈으니 그 원한이 어떠하겠습니까? 옛날 한 어진 군수는 ‘감옥에 있고서야 어찌 마음이 평안하겠는가. 옥문에 나아가서 판결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성상께서는 어진 마음으로 살상을 그치려 하셨는데 관리는 백성의 고충을 제거하는 것으로 급무(急務)를 삼아야 할 것인데 어찌 옛날의 어진 군수와는 어긋나는 처사만 하고 있습니까?”

백성들을 사지로 몰고 가는 가혹한 세금과 부역 그리고 부정한 형벌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진술한 조헌은 나라의 운명이 마치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떠있는 물이 새어 기울어가는 배의 운명과 같다고 비유했다.

“아! 어린아이가 물이나 물속에 빠졌다면 옆에 있던 사람은 자기의 몸이 물에 빠지거나 머리카락이 불에 타거나 돌보지 않고 빨리 달려가서 힘써 구원하여야만 실오라기만큼 붙어있는 목숨을 보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민생이 곤궁하고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서 지금의 사태는 마치 억만(億萬) 창생(蒼生)을 새는 배에 태우고 출항하였다가 중도에서 폭풍을 만나서 돛을 잃고 사방을 돌아보니 망망대해에 배 대일 곳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조헌은 나라가 이 지경이 된 원인이 조정의 인재를 제대로 쓰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라고 지적하면서 재상과 조정 대신들을 규탄하고 충현을 기용하여 나라를 바로잡을 것과 왕실의 근검을 요구한다. 

“성상께서는 청명(聽明) 하시고 경사(經史)를 널리 읽으셨으니 흥망과 치란(治亂)의 근본적 요소를 밝게 보시고 익숙하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위급한 때를 당하여 전적으로 답답한 무리에게 위임하여 조종(朝宗)의 중기(重器 나라의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를 그르치게 하십니까?”

직설적인 문장으로 임금을 질타한 조헌은 김귀영(金貴榮), 유전(柳㙉), 정언신(鄭彦信) 등이 재물을 부당하게 모으고 변방 장수를 뇌물을 받고 임명하며 군량을 군사들에게 제대로 먹이지 않고 사적으로 나누어 주는 등의 비행이 있다고 비판하고 우서(禹瑞), 서예원(徐禮元) 등 당시 장군들의 무능함을 질타했다. 또한, 조정의 대신이던 정탁(鄭琢), 정언지(鄭彦智), 권극례(權克禮) 형제, 정윤복(丁胤福), 조인후(趙仁後), 윤국로(尹國老), 이인(李訒), 김응남(金應南), 유성룡(柳成龍) 등은 무능하고 비도덕적이라고 비판했으며 이산해(李山海)는 처벌하라고 강경한 언사로 상소했다. 

목숨을 내건 대담한 이 상소는 당시의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자들에 대한 엄중한 비판이었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이었다. 상소를 올린 조헌은 궐문 앞에 거적을 깔고 도끼를 옆에 놓고 엎드려 임금의 비답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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