權不十年(권불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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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不十年(권불십년)
  • 김병학 편집국장, 언론학박사
  • 승인 2021.11.25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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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처럼 무자비하고 광기에 사로잡힌 행동을 한 사람이 또 있었을까, 아무런 죄도 잘못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해 죽음으로 몰아 놓고도 일말의 양심이나 죄책감도 없었던 그. 우리는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너무도 긴 고통의 터널을 걸어야만 했고 지난 40여 년의 세월을 남몰래 흐느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늘 정당성을 외쳤고 자신의 명령에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에 대해 죽으면서까지도 단 한마디의 사과나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사람과 한 영토에서 같이 숨쉬고 살아왔다. 참으로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그가 드디어 죽었다. 오죽했으면 한 정당에서는 성명서를 내고 “전두환 사망, 천수를 누린 죽음에 유감이다. 전두환의 명복을 빌 수 없다. 학살자 전두환의 이름은 민주주의를 짓밟은 탱크와 함께 녹슬되 역사 속에서 민중의 반역자로 영원히 안식하지 못하길 기원한다”라는 악담을 퍼부었을까. 

사람은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일단 죽음을 맞이하면 최대한의 예를 갖춰 조의를 표하는게 상례다. 심지어 집에서 기르던 개도 죽으면 산에 묻어 주거나 개전문 화장장에서 일련의 장례식을 치러 준다. 하물며, 사람의 죽음에서야. 당연히 애도를 표하고 진심으로 명복을 빌어주며 다음 세상에서는 근심 고통없이 편안하게 살기를 기도한다. 그게 사람이 살다간 뒷모습에 대한 표현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러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아니 아예 대접을 할 생각조차 없었다. 비록 90년이라는 세월을 살다 갔지만 그간 얼마나 많은 피해자와 가족들이 그가 죽기만을 기다렸을까. 

하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어떤 사람은 그런 사람을 대놓고 두둔하는 발언까지 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히다. 두둔할 사람을 두둔해야지 어떻게 그런 사람을 두둔할 수 있단 말인가, 환언하면, 자신도 전 씨처럼 무고한 백성을 죽이기라도 하겠다는건가. 그런 사람이 일국의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비극을 예약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굳이 성경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가능한 약자들을 보듬어 주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며 무엇 때문에 억울해 하는지 보살피는게 사람으로서 취해야 할  도리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니이다’(시편 90편 10절)라고 했다. 그만큼 세월이 빠르게 지나간다는 의미일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 자신만은 백년 아니 천년을 살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헛물을 켜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비록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결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한다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데 아이러니의 극치를 이룬다. 

도대체 왜 그럴까,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옥죄이는걸까, 현실에서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최선을 다해 상대방을 헐뜯고 빼앗으며 심한 경우 목숨까지도 앗아가는데 조금의 주저함이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작금의 현실을 보면서 그저 돈만이 최고이고 권력만이 지상제일주의라는 사고에 환멸을 느낀다.

왜 그럴까,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재산이 많으면 뭐하고 강한 권력을 잡으면 뭐한단 말인가. 어느 누구도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있을 수 없고 죽을 때는 그저 빈손으로 가는게 인생인데 말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사실을 왜 그들은 애써 부인하려드는 걸까.

전두환, 그를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까, 무고한 국민을 사지로 내몬 살인자라고 할까 아니면 어느 정치인처럼 끝까지 감싸고 돌까. 동물이야 배고프면 자신보다 약한 상대는 무자비하게 물어 뜯어 배를 채우지만 사람은 달라야 한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아무리 권력이 탐이 나도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가 있고 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동물도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고 자신의 코 앞에 먹이가 지나가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그런데 사람은 그러하지 못한다. 배가 불러 터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보다 약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죽을 힘을 다해 빼앗고 빼앗아 쌓아 두고 또 쌓아 둔다. 그러고도 자신은 늘 당당하게 부를 축적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역사의 원흉 전 씨는 갔다. 두 번 다시 그러한 사람은 지구상에 태어날 수도 없을 것이다. 2021년 11월 23일로 대한민국은 역사의 한 죄인을 심판했다. 아니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이럴 때 쓰는 말이 ‘축 사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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