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부터 갈대는 운명을 변호하고 있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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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부터 갈대는 운명을 변호하고 있었다(2)
  • 김용현 법학박사, 시인
  • 승인 2021.12.30 1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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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학과 교통사고 그리고 심우정

37세의 나이에 방송대를 졸업한 뒤 대학원 진학이나 상위학문을 연구하던 중 1992년 6월 15일 밤 9시 34분 부여 부소산성 정문 앞 도로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에서 만취한 무보험 과속 포터 트럭에 들이받혀 10여 미터를 날아가 아스팔트에 머리 등을 부딪친 교통사고로 46일 만에 깨어났다. 뇌를 다쳐 어려운 가운데도 의지로써 석·박사학위 취득은 물론 우송대학교 겸임교수이자 대전고등법원 사무국장을 역임한 뒤 법원관리관으로 명예퇴직했다. 그 뒤 법무사사무실을 운영하였고 대전가정법원 등에서 상담위원과 조정위원, 대전고등검찰청 항고심사위원 등으로 봉사, 그 어려운 법률문제를 알기 쉽고 명쾌하게 상담해 주거나 이혼당사자가 모두 잘 받아들이는 조정을 해주거나 계속 수사여부를 심사해 줌으로써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하다가 청주지방법원 사무국장 시절 ‘국가인재DB(Data Base)’에서의 요청으로 이에 등록되어 있기에 국가가 부를 때를 기다리며 지금은 비단가람(錦江) 물 맑은 내(沃川) 가에 전통정자 ‘심우정尋牛亭’을 지어 놓고 이에 올라 젓대를 아뢰며 선학들과 노니는 중이리니…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필자는 물론 방송대 학생들은 직장에서 업무에도 충실해야 하고 배움과 가르침도 함께 함으로써 여러가지 일을 겹쳐서 처리해야 하는 때가 참 많은 것이 현실이다. 즉 살아가는 데에는 많은 일을 겹쳐 처리하게 되는데 이 일들의 겹침을 어떻게 해소하고 적확하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갈린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에 대한 중요도를 가리고 우선순위를 정하려고 기준을 정했는 바 이른바 ‘시소질량능時所質量能의 원칙’이다.

‘時’는 지금 바로 처리해야 하느냐? 조금 여유를 가지고 해도 되느냐? 이고 ‘所’는 여기나 현재에서 거리나 시간 등이 가까우냐 머냐? 기준이며 ‘質’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느냐? 조금 덜한 평범한 것이냐? 이고 ‘量’은 늘 있는 일상적인 일이냐? 큰 노력과 비용 등이 필요하느냐? 또는 한 사람에 국한되느냐? 많은 사람이 연관되느냐? 이며 ‘能’은 가장 중요한 요소로써 내가 할 수 있느냐? 하려고 해도 자질이나 능력, 재원들이 미치지 못하여 할 수 없느냐? 기준이다.
이 기준에 의해서 처리하면 대개는 겹치는 많은 일을 무난하게 처리할 수 있었으나 정말 판단하고 결정하기가 어려울 때도 많았다. 

전도정시顚倒正視, 거꾸로 서서 바로 보기

하품만 크게 해도 양쪽 산 능선이 닿을 정도로 궁벽한 산골짜기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필자는 부모님의 인격이 훌륭하셨던 고로 올바른 가정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래서 부모님의 뜻에 거스르는 일이 없었고 틈만 나면 열심히 공부하여 초등학교 다니는 동안 줄곧 우등상을 탔으며 주위 사람들도 참 부지런하고 성실하다고들 칭찬하곤 했다. 그러나 가난한 가정경제는 중학교 진학을 허용하지 않았다. 어찌어찌하여 둘째 형의 도움으로 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으나 이 학교마저 재정난으로 결국 2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렇지만 낙심하지 않고 낮에는 농사일을 거들고 밤에는 열심히 통신강의록을 보았다.

그러다가 청운의 부푼 꿈을 안고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다. 서울에서의 고학은 참으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처음 시작한 곳은 가구공장이었는데 여기서는 보수란 없고 숙식을 제공하는 데에 불과했다. 그래서 학업을 위해서는 신문팔이 이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즉 신문팔이를 하면서야 야간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말이 학교 다니는 것이지 학교에 가는 날은 일주일에 2~3일에 불과해 ‘결석대장’이라는 별명보다 밀린 기성회비 때문에 교무실에 불려 다니는 단골손님이 되었다. 더구나 굶는 날이 먹는 날보다 많았고 그 추운 겨울에도 난로는 피우나 마나 맨바닥에서 털 빠진 군용담요만이 추위와의 싸움을 위한 유일한 무기이자 방패였다.

그러던 중 어느 친절하고 눈물겹도록 고마운 분의 도움으로 목공예를 하게 되었고 학업도 계속하여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졸업하는 나를 기다리는 것은 군대 징집영장이었다. 그리도 어렵사리 딴 고교졸업장을 써먹지도 못한 채 군대에 가서 3년(그때는 복무기간이 거의 3년이었음)을 기다려야만 했다. 차라리 말뚝(직업군인)을 박아 버릴까? 군대는 그래도 먹을 것과 잠자리는 제공하잖아…

제대 후 형들의 도움도 있고 본인도 하루에 두 시간만 자는 등 열심히 노력한 바 있어 9급 법원서기보시보 공개채용시험에 합격하고 발령받은 이듬해에 법원주사보 공개채용시험에 합격, 그다음 사무관 승진시험에 합격하였고 그 뒤로 법원서기관·부이사관·이사관으로 근무하다가 일반직 최고직위인 법원관리관(1급)으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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