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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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39)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2.01.20 1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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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이유는 석사과정을 마치면서 곧바로 박사과정 시험에 응시하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에서는 하나도 없었다.

이대는 그 당시 다른 것은 몰라도 박사과정 영어시험 하나는 어렵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래서 모든 석사 졸업생들은 보통 석사학위를 받고 2~3년 영어공부를 별도로 준비한 후에 박사과정에 지원했다. 영어시험이 어려워 한 번에 박사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드물었고 보통 두세 번 입학시험을 본 후에야 합격했기에 바로 박사과정을 밟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 상식이었다. 석사 논문심사가 끝나갈 무렵 최영희 학장님의 마지막 강의시간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강의가 끝난 후에 학장실로 들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이유를 대강 알 것 같아서 대답은 ‘네’ 하고는 강의가 끝나자 경북대학교 P 교수와 동창회관 식당으로 갔다. 최영희 선생님께는 NMC 강의가 있어서 바로 학교로 가야 한다는 쪽지를 남기고 나왔다.

P 교수가 최 학장님이 들르라고 했는데 왜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가면 틀림없이 박사시험 보라고 말씀하실 거예요. 나는 박사시험 볼 생각이 없어졌는데 뭐라고 답을 드릴 수가 없어서 차라리 뵙지 않으려고요.”

그러자 P 교수가 석사 논문심사도 안 끝났는데 박사시험 생각은 언감생심 아니냐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그만 놀라 기절할 뻔한 일이 벌어졌다. 그런 대화를 하고 있는 내 앞에 최영희 교수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선생님께서 여길 웬일이세요?”

“아니, 송 선생이야말로 내 방에 들르라고 했는데, 강의 때문에 시간 없어 간다고 하더니 여기서 식사하고 있어요?”

무를 뽑다 들킨 놈처럼 뭐라 할 말이 없어 식사 후에 학장실로 가겠다고 말씀드릴 밖에 없었다. 일부러 동창회관 식당으로 피해 왔는데 그 많은 식당 중에 하필이면 이곳이라니….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학장실에 들렀다. 예상했던 대로 선생님께서는 “송 선생, 이번 박사과정 입학시험을 꼭 신청해서 시험을 보세요.”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 저는 아직 시험 볼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대 영어시험은 너무 어려워 2~3년 별도로 영어공부를 해야 시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잘 아시잖아요. 올해에도 간호학과에는 박사생이 한 명도 못 들어오고 소문으로는 두세 번 만에 다들 합격한다는데요.” 

그러자 선생님은 “아니, 송 선생이 무슨 통뼈에요? 이번 시험 한 번 보고 합격하려고 했다는 말인가요? 이번 시험은 준비삼아 시험이 어떻게 나오나 하는 경향을 알아두기 위해서 보라는 것이지요.”라고 하셨다. 그 말씀에 나는 “떨어질 시험을 왜 봐요? 선생님, 저는 지금까지 어떤 시험도 떨어져 본 일이 없는데 경험 삼아 떨어질 것이 뻔한 시험이라면 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시험을 보지 않겠다면 나는 앞으로 송 선생과는 절연할테니 그런 줄 아세요.”

나는 석사과정에서 만나 가까이 친구처럼 지내고 있는 경북대 P 교수에게 있었던 사정 이야기를 다 했다. 

“그럼 시험을 봐야지 어찌하겠나? 선생님께서 절교까지 하시겠다고 강력하게 시험을 권유하셨다면….”

“그럼 나 혼자 보기가 그러니 같이 시험을 보자.”

P 교수는 영어공부를 하고 2년 후쯤 보겠다며 내 제의를 거절했다. 박사시험을 생각하니 또 머리가 복잡해졌다. 84년 당시만 해도 전국 3년제 간호대학 교수 중에는 박사학위 소지자가 없었다. 3년제 대학 뿐 아니라 서울대 간호대 교수 중에도 박사학위가 없는 교수가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박사시험에 합격한 것만으로도 뉴스감이 되던 때였다. 그런 간호계의 분위기에서 선배 교수들이 아무도 박사과정을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오랫동안 간호계를 떠나 KAL로, 전업주부로 거의 8년을 외도하고 막내로 들어온 초짜 교수가 박사를 하겠다고 교무과장한테 운을 떼는 것 자체가 내게는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어떻게 이야기를 할지 고민하다가 어쨌든 한 번은 부딪쳐야 할 일이니 최소한 대선배인 교무과장님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지혜를 짜내야 했다. 더욱이 당시 교무과장님이 박사시험에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난 후여서 더욱 고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선생님, 저도 어차피 교수를 하려면 박사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요. 아시다시피 누구나 첫 박사시험에 합격할 수는 없는 일이니 이번에 제가 이대 박사시험에 지원해도 떨어질 것은 뻔하니까 영어시험 경향을 파악해서 선생님께도 정보를 드릴게요. 경향을 알고 그에 맞춰 선생님도 저와 함께 영어시험 준비를 해서 다음 기회에 박사시험을 같이 보시면 어떠시겠어요?”

이렇게 말씀드리자 다행히 교무과장님도 그 생각 좋은 아이디어라면서 흔쾌히 받아들이셨고 박사시험 보는 날 강의시간까지 해결해주셨다. 일단 큰 고비 하나는 넘긴 것이다.

God has a plan for me

아무 준비도 없이 최영희 학장님의 절교 선언과 석사 논문심사가 겹쳐 정신없는 시기에 박사과정 시험날이 왔다. 12월의 혹한에 이대 중강당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첫 시험시간이 10시부터 12시까지 영어시험이었는데 강당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숨이 멎는 듯 했다. 중강당 의자가 이미 박사 지원자들로 가득 찼고 그보다 나를 질리게 만든 것은 그 많은 수험생이 전부 책상에 고개를 숙이고 책을 보며 영어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까만 머리만 내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볼펜 하나만 달랑 핸드백에 넣고 간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너무 무모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내 수험번호가 붙은 책상을 찾아 앉았다. 들여다 볼 영어책 한 권 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자니 묘한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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