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 회군
상태바
위화도 회군
  • 김병학 편집국장, 언론학박사
  • 승인 2022.03.03 11: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때는 고려 후기 우왕 14년 5월, 요동 정벌이라는 왕명을 받은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위화도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출정 명령을 받은 이성계는 요동 정벌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 그러한 이유로는 당시 요동 지역의 상황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첫째는 고려라고 하는 소국이 중국이라는 대국을 상대로 싸울만한 힘도 없었거니와 계절적으로도 때가 때인지라 한창 농번기인데다 시시탐탐 왜구가 다시 침공해 올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더욱이 무더운 여름철이라 활의 줄이 풀리기 십상이며 병사들 또한 질병에 걸리기 쉬워 어느 하나 전쟁을 치를만한 여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 번 뜻을 품은 우왕은 계속해서 이성계로 하여금 출정을 요구했다, 급기야 그러한 우왕의 설득력없는 명령에 이성계는 우군도통사라는 자리까지도 사직하려 했다.

그때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후에 태종)인 방원이 “이 일은 필시 최영이 아버님을 제거코자 함인바 굳이 사면코자 하시오면 최영이 필연코 아버님이 왕명을 거역한다는 죄목으로 얽어 넣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럴바에야 차라리 군사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가 형편을 보아 조처하심이 상책인 줄 아옵니다”라고 귀띔했다.

그 말을 들은 이성계는 깨달은 바가 있어 일단은 출정키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군사를 이끌고 전장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막상 전장에 도착한 이성계는 굽이치는 큰 장마를 보고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우왕의 명령을 따를 경우 자신이 이끌고 간 병사들의 목숨은 도저히 장담할 수 없었다. 이에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함께 상소를 올렸다. 현지 여건상 도저히 전쟁을 할 수 없으니 ‘회군’을 허락해 달라고.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래도 진군하라는 명령 뿐이었다.

이때 이성계는 고심에 빠졌다. 그리고 장수들을 향해 외쳤다. “내 순리와 역리로써 상소를 올려 회군을 간청해 보았으나 왕과 최영이 듣지 아니하니 인군 곁에서 참소 당하는 악당(최영)을 제거하여 생령을 편안케 하려 한다”고.

이 말을 들은 병사들은 크게 기뻐하며 이성계를 추앙했다.

실제로 당시 위화도는 수십일째 내려 붓는 장마로 완전히 잠겨 버렸으며 형체마저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본 병사들은 한편으로는 이성계의 판단에 놀라워 하면서도 이성계에 대한 충성심을 더욱 다지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렇다. 이성계가 살던 그때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이나 사람살이란 별반 다를게 없다. 만일 당시 이성계가 우왕의 명령만 믿고 따랐다가 자신이 몰고 간 병사들을 강물에 참수시켰다고 생각해 보라,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비록 왕의 명령을 어긴 장군의 태도는 비난받을지 몰라도 무고한 군사들의 생명만은 지켜야겠다는 이성계의 판단이 훨씬 가치가 있다. 

조직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직의 리더가 아무리 확고하고 분명한 판단을 바탕으로 조직원들을 향해 명령을 내린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명령이 사인 간 감정을 바탕으로 한다거나 조직 전체에 위험이 닥친다고 한다면 기꺼이 항명할 줄 알아야 한다. 당장에는 비난을 받고 수모를 당할지 몰라도 약간의 시간만 흐르면 그러한 결정이 얼마나 현명하고 조직을 살리는 길이었는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아니면 ‘아니오’라고 소신있게 행동하는 그런 사람이 참 지도자요 리더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