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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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64)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2.05.04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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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전하, 왜국사신의 목을 베소서

일본을 다녀온 사신의 소식은 조헌의 예견을 더욱 분명히 해 주었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여전히 조정은 당쟁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는 왜국 사신의 목을 베어 일본에 경고하고 명나라와 인접 나라에도 이를 알려서 일본의 침략 야욕을 꺾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사의 목을 쳐서 명나라에 알려야 한다는 주장은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중국의 절대적인 영향 속에 놓여있던 조선으로서는 자칫 중국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다가 왜적의 침공보다도 더 혹독한 대가를 치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조헌은 이러한 우려를 없애기 위해서 조속히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통신사의 왕래와 일본의 흉계를 알릴 것이며 우리는 서둘러 침공에 철저히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서 보다 시급한 것은 임금을 일깨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초야에 묻혀있는 그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계절은 어느새 3월이 되었다. 조헌은 또다시 붓을 들었다. 왜사의 목을 베어 명나라에 보낼 것을 촉구하는 상소문을 쓰려는 것이다. 이것이 청참왜사1소(請斬倭使一疏)이다.

그는 청참왜사일소외에도 ‘황조(皇朝)에 아뢰는 표문(表文) 초안’, ‘유구 국왕(琉球國王)에게 보내는 국서 초안’, ‘대마도와 일본국 유민(遺民)을 효유하는 편지’, ‘적사(敵使)를 참(斬)하는 데 대한 죄목’, ‘영남과 호남의 비왜책(備倭策)’을 함께 작성했다.

이를 가지고 대궐에 나아가 임금께 직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임금에게 사세의 긴박성을 일깨울 수만 있다면 목숨이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리기로 결심했다. 이번의 지부상소는 함경도 길주 유배를 불러온 논시폐소(論時弊疏)에 이어 두 번째이다. 나라의 사정이 그만큼 절박한데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조정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는 백의(白衣)로 단장하고 어깨에 도끼를 메고 옥천을 출발했다. 한양에 도착한 조헌은 대궐에 이르러 상소문을 올리고 도끼를 옆에 놓고 대궐 문 앞에 엎드렸다. 

청참왜사일소(請斬倭使一疏) 
1591년(선조 24년) 3월 15일

 “신이 듣건대 일본에 갔던 사신이 돌아오자 적선(賊船)이 해변에 와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우리나라를 함몰시키고 중국을 침범할 경우 중국에 대해 변명할 길이 없고 이들이 기회를 포착하여 갑자기 쳐들어올 경우에는 해변의 방어가 너무도 허술합니다. 반드시 전쟁이 있을 지역인데도 아직까지 조충국(趙充國)과 같은 경략(經略)이 없었고 원(元)나라 사신을 영접하지 말라고 항의한 정몽주(鄭夢周) 같은 이도 없었습니다. 진회(秦檜)와 왕륜(王倫)이 나라를 그르치자 변주(汴州)와 항주(恒州)가 함몰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필부(匹夫)가 군왕을 현혹시키자 수욕(羞辱)이 자심하여 강상이 날로 실추되고 군부의 화(禍)가 급박하여졌으므로 간담이 찢어지는 듯한 분노로 머리털이 곤두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삼가 오늘의 사세를 헤아려 보건대 국가의 안위와 성패가 매우 긴박한 상태에 있으니 참으로 불안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히 왜사(倭使)의 목을 베고 중국에 주문(奏聞 주달)한 다음, 그의 사지를 유구(琉球) 등 제국에 나누어 보내어 온 천하로 하여금 다 함께 분노하게 하여 왜적에 대비하도록 하는 한 가지 일만이 전(前)의 잘못을 보완하고 때늦은 데서 오는 흉함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나라가 쇠망한 끝에 다시 흥복시킬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삼가 성주(星主)께서는 속히 잘 생각하시어 사람이 못났더라도 말만은 버리지 말고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하여 지체하지 말았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조헌은 왜사(倭使)의 목을 베어 중국은 물론 유구와 남방의 여러 나라에 알려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중봉은 두 가지의 문제를 염두에 두었다. 하나는 역사적으로 중국의 노여움을 샀을 때에는 반드시 엄청난 보복이 돌아온다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남방의 여러 나라들과의 연합하여 일본의 침략을 방비하자는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조선의 안타까운 사정은 이어지는 글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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