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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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65)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2.05.12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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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請斬倭使一疏> 전하, 왜국사신의 목을 베소서!    

“신이 삼가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의 말을 듣건대, 왜적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서남만(西南蠻)의 제도(諸島)와 양절(兩浙)에다 팔면 그들이 다시 전매(轉賣)되어 일본으로 되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객상(客商)들의 왕래가 베 짜는 북처럼 왕래하고 다닌다는 증험입니다. 

간교한 오랑캐가 우리에게 답한 글에 이미 자신들의 성세에 대해 극히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데 하물며 남양(南洋)의 제국(諸國)에야 그들의 무력을 자랑하여 겁을 주지 않았겠습니까? 신은 황윤길의 배가 처음 대마도에 정박했을 때에 저들은 반드시 먼저 남양의 제도에 전파하여 조선과 통신했다고 하면서 제도(諸島)를 복속시키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 말을 절동(浙東)과 절서(浙西)의 장리(將吏)가 듣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황제에게 알리지 않았겠습니까? 중국이 의심하는 것은 실로 오래입니다.

더구나 이 교사스러운 오랑캐는 항상 상대가 방비하지 않고 있을 적에 기습적으로 공격함을 이롭게 여기고 있으니 만약 우리 변방의 장수가 능히 방비하여 절연히 침범하기 어렵게 되면 저들은 반드시 중국을 침범하는 것이 이롭다고 여길 것입니다. 따라서 소주(蘇州)·항주(杭州)에 말을 퍼뜨리기를 “우리는 이미 조선을 복속시키고 군대를 이끌고 왔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이 빠르게 전파되어 반달이면 명경(明京)에 아뢰게 될 것입니다. 

“저자에 범이 있다”라고 여러 번 말하자 듣는 사람이 모두 그런가 하고 의심하였으며 “사람을 죽였다”는 말이 세 차례나 들려오자 증자(曾子)의 어머니도 베 짜는 북을 내어 던지고 달아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호랑이와 승냥이 같은 사나운 나라들 사이에 끼어있고 성상의 학문이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지경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명나라 임금이 증자의 어머니가 되지 않는다고 기약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령 명나라가 북쪽에 있는 오랑캐와 남쪽에 있는 왜적의 침공을 받아 소정방(蘇定方)과 이적(李勣) 같은 군대를 동쪽으로 파견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중국 조정에서 우리나라를 오랑캐로 빠져 들어갔다고 여겨 허겸(許謙)이 후회하듯 하고 사가(史家)가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다면 당당한 예의의 나라로써 또한 너무도 수치스럽고 오욕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조종(祖宗)의 2백 년간 수치스러운 종계(宗系)의 일을 겨우 정성을 다하여 소설(昭雪 누명을 해명함)하였는데 전하에게 끼쳐질 천만세의 오욕을 제 때에 씻어버리지 못한다면 삼강오륜이 장차 이로부터 땅에 떨어지고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령께서도 반드시 제향(祭享)이 끊기는 슬픔이 있게 될까 염려스러울 뿐더러 배우지 못한 신민들에게 윗사람을 위해서 죽는다는 도리를 책임지우기가 어렵습니다.(중략)

한 번 사신을 늦게 출발시키게 되면 만사가 와해되는 걱정이 있게 되는데도 잘못을 감추려는 신하들은 손을 잡고 화를 부르고 있으면서도 중국이 격노할 것을 걱정스럽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시(城市)와 촌야(村野)의 백성들은 모두가 입을 모아 왜사(倭使)를 베지 않으면 의리를 진기시킬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의도는 명나라를 공격하겠으니 조선은 길을 내고 선구(先驅)가 되라는 것이었다. 통신사를 보내서 교린한 조선이 일본과 공모한 듯이 하여 조선과 명을 이간시키고 조선을 곤경에 몰아넣자는 심산이었다. 조헌은 임금에게 “만약 명나라에서 일본의 이러한 간교를 깨닫지 못하고 당의 이적(李勣)과 소정방(蘇定方)이 군사를 몰고 왔듯이 죄를 물어 온다면 어떻게 사과할 것이며 우리의 백성이 어떻게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에 뜻하지 않은 재난이요 위기라고 하겠으나 어쩔 수 없이 부딪친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조정에서는 자주적인 대비책을 세우지 못한 채 적세(賊勢)에 위축되어 당혹할 뿐이었다. 이때 조헌은 분연히 일어나서 왜사의 목을 베지 않으면 이 어려운 정세를 떨쳐 일어날 수 없으며 더 늦지 않게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오해가 없도록 조속히 조치할 것을 간곡히 주장하였다.  

이러한 긴박한 역사적 시련 속에서 그는 나라의 운명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역사의 방향과 민족의 활로를 제시하기 위해 분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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