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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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희생
  • 옥천향수신문
  • 승인 2016.08.11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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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자 수필가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촉촉히 내리는 날, 어느 시골 마을회관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만난 한 김 할머니의 이야기다. 8살 때 피난 후 앞집 여자와 뒷집 총각이 만나 결혼해10년 살면서 5남매인 딸3, 아들2을 낳은 후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했다. 갑자기 찾아온 불행으로 가족 모두의 생계는 할머니의 몫으로 남겨졌다. 6식구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만 했다.

남편은 삼형제 중 둘째였다. 당시 시댁 형편도 넉넉지 못해 살림 나가서 살기가 어려워 한집에서 큰아들과 둘째딸 낳고 살림을 나갔다. 시 아주버님은 쌀 1말, 냄비 한 개, 수저 젓가락 5개, 보리딩겨 두 말을 주었다. 시집올 때 해온 이불로 겨우 자식들 덮어주고 부부는 새우잠을 자야만 했다. 먹는 거라도 제대로 먹어야 되는데 딩겨가루로 수제비를 떠서 주고 쌀밥한 그릇 제대로 못해주고 보낸 남편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점점 굳은살이 박혀가는 손등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도 일을 해야 했던 할머니는 아이들은 꼭 가르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텼고,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에 일에만 매달리며 살았다. 남편과의 좋았던 추억이란 기억도 없는데 보리밥을 해서 광주리에 이고 일하러 가면 멀리서 알아보고 광주리를 받아 주는게 애정 표현이었다. 밭고랑에 앉아풋고추 따서 된장에다 찍어 먹고 하루 해가 뉘엿뉘엿 넘어 갈 때 광주리를 옆에 끼고 남편이 먼저 간 논둑길을 아이 손잡고 걷다보면 남편 생각이 났고 남편이 일하는 밭에 쌀밥 한번 갖고 가지 못한 것이 맘에 걸린다.

그렇게 갈 줄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쌀밥 한 그릇 갖다 줄걸” 하시며 목이 멘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죽고 싶은 생각에 막내딸과 작은 아들을 데리고 자살하러 산으로 갔다. 아무것도 모르고 넓은 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니 차마 자살을 못하고 집으로 돌아 왔다. 내 살갗이 벗겨지고 등골이 휘어져도 내 자식은 내가 지키겠다고 두 자식을 데리고 오면서 힘들면 쉬어가라는 친정아버지의 말이 생각났다. 농사꾼은 자기가 짓는 땅을 땀으로 적셔야만 먹고 산다는 일념으로 버텨 왔고 어둑한 불빛에 자고 있는 자식들을 볼 때 “저것들이 부모 잘못 만난 죄 밖에 없는데…” 하면서 잠든 자식들 얼굴을 만져보고 잠이 들었다. 그동안 얼굴에 구루무 한번 제대로 발라보지 못했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7남매 세숫물을 데워 주고 춥지 않게 군불을 지펴 주는 것도 할머니의 몫이었다.

순간 나도 아버지와 재혼하고 고생하다가신 엄마가 생각났다. 아버지와 재혼을 했지만 엄마의 일생은 그다지 평범하지 못했다. 나이 차가 많은 남편과 살면서 주위에서는 가끔 아버지를 엄마의 시아버지로 착각할 정도였고 나 또한 아버지라 하기엔 부끄러웠다. 철없던 유년시절, 그런 부모님이 싫어 한때는 집을 나와 방황도 했었다. 보따리를 이고 골목길 접어드는 엄마의 그림자가 보이면 반갑게 뛰어가야 되는데 누가 볼까 부끄러움에 피하곤 했다. 그래도 그땐 나는 아버지가 계셨고 군불을 지펴 세숫물도 데워 주시고 엄마의 고생을 많이 덜어드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가족들 중에 나를 무척이나 사랑하셨고 동네에서는 선비로 대접 받으셨던 분인데 그런 아버지를 부끄러워하고 원망 했던 기억들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어디가 얼마나 아프냐고 물었더니 젊었을 때 못 먹어서 소화도 제대로 안 되고 일을 많이 해서 온 몸이 다 아프다고 한숨을 쉬었다. 어릴 적 친정 역시 가난해서 입이라도 하나 덜자고 외갓집으로 보냈다. 외숙모 눈치 보면서 일해주고 겨우 밥만 얻어먹고 사느라 학교 문턱도 못 가봤다. 얼마 전, 어버이날에 둘째 딸이 꽃바구니를 갖고 왔다.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언니 부부랑 일본 여행 간다고 같이 가자고 한다. 남편이 있으면 당연히 같이 가지만 사위도 어렵고 싫다고 했다. 물론 부부가 같이 여행가는 게 제일 부럽지만 나 혼자 즐겁다고 딸들 따라 갈수는 없지. 아직도 딸집은 남의 집 같고 아들 집에 가야 편하게 있다 온다고 했다.

두 며느리가 진짜 잘해줘. 물론 사위들도 잘해주지만 사위는 나보다 즈그 부모한테 잘해야지. 나는 우리 아들 며느리가 최고여 한다.” 이제 계절도 서서히 가을로 접어들고 있다. 몸과 마음도 들녘에 곡식처럼 풍요로움으로 가득 했으면 한다. 바람 많은 땅에 말없이 버팀목이 돼주셨던 어머니, 늦게 핀 가을꽃처럼 남은 생도 은빛날개 펼치시고 주름 골짜기마다 하얗게 수놓은 구절초 향으로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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