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워진 삶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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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워진 삶의 무게
  • 박근석 수필가
  • 승인 2022.06.30 11: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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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술에 소름이 쫙~, 기복과 변화가 심했던 지난 날을 송두리째 들춰도 이렇게 강도 센 쓴맛은 처음이다. 식재료 특성상 캔디 같은 달콤함은 기대하지 않았다. 

‘뭐가 문제였을까.’ 실신 일보 직전이다. 역사드라마에서 임금이 죽을 죄를 지은 신하에게 내린 독약이 이런 맛? 

사람마다 타고난 소질이 다르다더니 어제 아는 사람이 끓인 쑥국은 털고 싶은 근심으로 갑갑했던 기분을 순간적으로 날게 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요리하는 것을 지켜봐서 안다. 조리대 앞에서 별 양념없이 설렁설렁 끓인 것 같았는데 계절 바뀔 때 기온 차를 간신히 따라가는 허약 체질이 먹기에 딱 맞았다. 

보약 같은 음식과 쫄깃한 주변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 식사가 마무리될 때쯤 부쩍 수척해진 남편 얼굴이 떠올랐다. 당장 식탁에 올리고 싶었다. 운동선수가 가볍게 몸 풀 듯한 차림으로 오픈 시간에 맞춰 마트로 갔다. 

주재료인 쑥이 보이지 않는다. 비스킷과 스낵만 눈에 띈다.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군것질거리를 장바구니에 담고 나니 그제야 채소코너에 쑥이 보인다. 매번 장을 볼 때마다 제철 과일과 푸성귀보다는 입맛에 알맞게 제작 공정을 마친 냉동이나 냉장식품에 손이 간다. 나이와 동떨어진 아직도 철없는 입맛이다.

물기가 장신구 같다. 채반에 씻어놓은 쑥이 잠시라도 한눈팔면 날아갈 듯 싱싱하다. 잇몸 드러나게 웃을 일이 많았고 시행착오로 다음 날 오전까지 눈언저리가 가라앉지 않을 만큼 울을 일도 많았던 혈기왕성했던 지난 날을 보는 듯하다. 

지금은 연륜으로 비움이 곧 채움이라는 걸 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는 차고 넘쳐도 왜 그렇게 쟁여놓으려 아등바등했던지. 마트에서 1+1묶음 행사하면 먹거리건 생필품이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소비기한까지 쓰지 못할 양인 줄 뻔히 알면서 장바구니를 채웠다. 특히 정육코너에서 구이용을 초특가 하면 고기 못 먹고 죽은 귀신에 씐 것처럼 냉동고 사정은 생각지 않고 전투적으로 사들였다.

쌀뜨물에 된장 풀어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청양고추를 썰고 마늘을 다지고 어슷하게 파도 썰었다. 어제와 같은 맛을 내기 위한 나만의 애씀이랄까? 평소 식재료 양념을 준비할 때는 가위로 대충 자르던 것을 오랜만에 살짝 들뜬 손놀림으로 도마를 사용했다. 

쑥쑥 쑥국, 쑥국이 끓어오른다. 혼자 보기 아까운 비주얼이다. ‘식당을 차릴까?’ 거품을 걷어내며 맛을 봤다. ‘이런 젠장’, 연신 숨을 토해내야 숨을 쉴 수 있는, 당장 처리해야 할 근심덩어리였다. 미련없이 냄비 채 하수구에 쏟아부을까 하다 해결책을 찾기 위해 입 안 가득 사탕을 물고 휴대전화를 열었다. 

놓친 양념이 뭘까 요리법을 찾아 차근히 훑어봐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 엉덩이 가벼운 남편은 십여 년 전부터 시간을 내어 나물 따라 밭둑이나 야산을 다닌다. 돌미나리와 냉이, 달래는 기본이고 취나물에 머위, 고사리 등을 채취한다. 고사리는 제사 모시는 큰형과 처남 주려고 삶아 볕에 말리고 다른 들나물은 마당에서 끓는 물에 데쳐 주방에 놓는다. 그러면 뭐 하나. 가시오가피 순과 머위나물은 고소한 참깨와 참기름을 들이부어도 강한 쓴맛으로 냉장고에서 식탁으로 들락거리다 버리기 일쑤다. 

예나 지금이나 힘들게 따온 잔대 싹이나 다래 순처럼 향이 밋밋한 것도 제 기분 내킬 때 가뭄에 콩 나듯 밥상에 올린다. 늘 내일로 미루다 냉장고에서 무르거나 말라 비틀어져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직행이다.

남편 코는 개 코, 퇴근 후 집에 들어서자 쑥 향을 감지했는지 온화한 낯빛으로 입맛을 다신다. 국 맛을 알기에 나름 밑반찬에 더 신경 쓰며 국은 대접 바닥에 깔리게 담았다. 남편은 양에 안 찬다는 듯 더, 더, 더 수신호를 보낸다. ‘에라, 모르겠다.’ 미안함으로 꿉꿉하게 눌린 기분을 내려놓고 원대로 보통날과 다름없이 담아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사약이라 느꼈을 만큼 쓰디쓴 것을 국물까지 마신다. 

이럴 수가? 더 달라고 한다. 국자로 국을 뜨며 다시 맛을 봤다. 역시 살 떨리게 진저리나는 쓴맛이다. 국을 건네며 “억지로 먹지 마.” “먹을 만해, 다음에는 쑥을 지금의 반만 넣어봐, 그러면 진짜…”

맞는 말인 것 같다. 양념 문제가 아니라 국물 양에 비해 쑥을 너무 많이 넣어 그렇게 쓴 것이었다. 미워하면 안 되는 우리 남편, 쓴맛이라도 나름 공들여 끓인 것을 안 먹으면 평생 두 번 다시 밥상에 안 올릴까 봐 저렇게 괜찮다, 먹을 만하다, 하는 듯 먹는 게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혼자 중얼거린다. 잘은 아니어도 이렇게까지 양을 조절 못해 음식을 망친 적은 없었는데 삶의 무게가 가벼워진 세상 탓을 한다. 홈쇼핑이건 마트건 흔하디흔한, 가격 대비 입맛에도 벗어나지 않은 다양한 밀키트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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