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물려주지 않겠다는 신념에 농사와 해외 노동, 구멍가게, 식당 일까지 하면서 억척같은 50년의 삶을 살아온 동갑내기 부부가 있다.
옥천군 군서면 상중리 ‘형제농장’ 황명자(여, 73) 대표와 김종환(73) 대표. 황 대표의 고향은 구일리, 김 대표의 고향은 상중리다.
황 대표는 “부모가 맺어준 인연인데 이 사람 버리고 딴 데로 가서 이보다 못한 집안을 만나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죽으나 사나 살아온 게 지금까지 50년을 살아왔다”고 했다.
황 대표의 옆에는 남편이 있을 땐 남편이 일을 해주고 남편이 자리를 비우면 아들들이 주말이면 찾아와 돕는 이젠 행복한 농부의 집이 되었다. 그 덕에 황 대표는 삼양초 19회 동창들과 1년에 한 두번씩 만나 옛날 살아온 얘기를 추억 삼는 여유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상중리에 새부자 탄생
담배 농사짓는 집안에 시집 와 끼니도 겨우 때우는 궁핍한 집안임을 알고 도망갈 궁리도 했다. 담배 농사 수확 철이면 시아버지 보증 빚에 찾아오는 채권자로 농사를 지음에도 여섯 명의 시동생들과 함께 생활함에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황 대표는 “남편이 이렇게 다 고생시키느니 내가 혼자 나가서 고생하면서 돈 벌어서 식구들 고생을 안 시키겠다며 서울로 가서는 토목을 배워서 사우디로 건설 노동자로 갔다. 사우디에서 1년 동안 돈 벌어서 시아버지 빚 다 갚고는 다시 사우디로 갔다. 그 후 2년 동안 집에 생활비만 조금 보내고 700만 원이라는 큰돈을 모아서 왔다. 그때가 1970년대이다. 그 돈으로 땅 4마지기를 샀다. 남편이 건축일을 해 해마다 땅을 사고 또 샀다.”며 “자식들 고생 안 시키고 가난은 안 물려주려고 배를 굶어 가며 허리띠를 졸라 매고 노력해서 땅을 장만하는 재미로 살았다”고 했다.
당시 ‘김종환’이는 부모 재산 손톱만치도 안 받고 노력을 해서 땅을 많이 장만해 상중리에 새 부자가 나왔다는 소문이 났다. 부부의 억척같은 인생은 한 푼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고 땅을 사는데 집중하는 악착같은 삶을 살았기 떄문이다.
황 대표는 “벼농사 1,600평과 1,600평의 비닐하우스, 335평의 대지에 대추나무까지 심어 놓았다. 남편이 한국에 있으면 나는 일 안 시키고 혼자 일을 도맡아 했다. 나는 따라가서 보조역할만 했다. 남편은 그렇게 자상하게 잘했다. 촌에서 농사지어봐야 돈벌이가 되나. 그래서 7년 간 직장도 다녔다”.
농사는 올케가 판매는 시누이가
농사는 잘 지어도 파는 게 고민이다. 다른 농부들과 달리 시누이와 올케 사이가 친자매처럼 좋아 농사와 판매가 서로 죽이 척척 맞아 황 대표가 농사짓고 대전의 시누이가 판매하는 형태로 수십 년을 이어오고 있다. 전문 장사꾼도 아닌 시누이의 마당발과 사람됨에 비록 초보적인 판매형태이지만 없어서 못 팔 정도다. 그리고 벼농사로 지은 쌀은 농협에 전량 수매로 유통한다. 특히 지난해에 벼 수매등급으로 특등급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황 대표는 “시누이가 대전에 사는데 주민들한테 미리 주문을 받으면 그곳에 다 판매를 한다. 작물이 깨끗해 상품성이 좋아 잘 팔린다. 내가 재배부터 포장까지 깔끔하게 잘해서 가지고 간다. 들깨 같은 경우 기름이 많이 나온다고 또 주문을 받는다. 사실 8kg 사면 10kg으로 듬뿍 준다. 그만큼 많이 주니까 또 사게 된다. 우리 시누이가 착해서 대전에서 인심을 얻었다. 내가 피땀 흘려서 농사지었더라도 사서 먹는 사람은 그게 아니다. 조금이라도 더 주면은 좋아 한다”.
농사만큼 잘 키운 자식 농사
아내를 극진히 생각하는 남편은 밭이 있는 곳에는 아내가 좋아하는 딸기 등 과수를 곳곳에 심어 둔다. 어떤 날은 아내를 위해 딸기를 따다 씻어서 갖다 주는 배려도 잊지 않는다. 지금은 혼자 농사를 짓지만 남편이 트랙터 등 각종 장비들을 마련해 줬다. 그래서 벼농사는 기계로 하고 아들들이 아버지를 닮았는지 며느리까지 주말마다 내려와 일손을 돕는다.
황 대표는 “내 자식이나 작물이나 똑같다는 생각으로 농사를 짓는다. 자식 잘되고 자손들이 건강하게 잘 되길 바란다”고 했다.
남편에 대한 감동 사연
김 대표는 건설 일을 하면서도 성격이 좋아 남한테 해로운 소리 못하는 마음씨 좋은 사람임에 황 대표가 감동한 일화가 있었다.
황 대표는 “남편이 집 짓는 공사를 하다 보면 업자가 돈이 없어서 못 주는 경우가 생긴다. 한 번은 업자 집에 돈을 받으러 갔는데 업자는 도망갔는지 집에 없고 그 가족은 땟거리가 없어 굶고 있어 오히려 쌀을 사주고 왔던 일이 있었다. 남편은 하청을 맡아 인부들 품삯은 우리 돈으로 다 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