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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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
  • 김김순 수필가
  • 승인 2023.03.02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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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곡식을 말릴 때 마당에 멍석을 깔고 널어 말렸다. 곡식을 널어놓으면 닭들이 와서 쪼아 먹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은 곡식 멍석을 지켜야 했다. 그런 별로 힘 안 드는 일은 어린 나의 몫이었다. 

긴 막대기 하나 들고 마당 한편에 자리 잡고 앉아 닭들이 멍석 주변으로 다가오면 막대기를 휘두르면서 “훠이- 훠이-” 소리를 질러 쫓아냈다. 그러면 닭들은 화들짝 놀라 ’꼬꼬댁! 꼬꼬댁!’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가는데 기가 막힌 것은 몇 발짝 가다 말고 ‘꼬꼬고, 꼬꼬’ 기분도 명랑하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닭들은 곡식을 먹겠다는 본능적인 식욕에만 충실할 뿐 조금 전 호되게 내몰렸던 그 무섭고 황망했던 사건은 전혀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닭 머리라지만 어쩜 그렇게 빨리 잊어버릴 수 있을까 웃음이 절로 나오는 일이었다.

치매 혹은 사고나 충격으로 뇌에 손상을 입어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을 기억상실증이라고 한다. 기억상실증과는 다르게 나이 들어 뇌세포가 소멸하면서 찾아오는 건망증이나 복잡한 생활 스트레스 때문에 순간순간 일어나는 깜빡 증도 있다. 가끔 건망증 때문에 착오를 일으켜 오해나 다툼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반대로 훈훈한 이야기가 있어 떠올릴 때마다 미소 짓게 한다. 

 따사로운 봄날 어머니는 병아리 부화 준비를 하고 계셨다. 보통은 둥지에 짚을 깔고 계란을 넣어 주는데 어머니는 둥지 바닥에 재를 깔고 그 위에 다시 짚을 깔고는 계란을 넣는 것이었다. 전에는 그냥 짚만 깔았는데 왜 재를 깔아 주느냐고 하자 재는 보온 효과가 있어 적정온도를 유지해 주기 때문에 부화가 잘 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훌륭한 생각을 할 수 있었느냐며 감탄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옆집 복순 할매가 알려준 것이라 했다. 이십여 일이 지나자 재의 효능인지 어미 닭의 정성 덕분인지 신통하게도 둥지 안의 알들이 파란 하나 없이 모두 부화했다. 

며칠 후 마실 온 복순 할매에게 어머니는 반색하며 잊지 않고 치사를 하셨다. 복순 할매가 알려준 대로 둥지에 재를 깔았더니 병아리들이 손실 없이 옹글게 부화를 했노라 며 고맙다 하셨다. 그러자 복순 할매는 의아한 표정으로 내가 언제 그걸 알려 주었느냐며 시치미를 뚝 떼는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되레 어머니가 자기에게 알려 주었다며 복순 할매도 재를 깔았더니 곯은 알 하나 없이 부화가 되었다며 고맙다 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나는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이며 누가 누구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어머니와 복순 할매는 한사코 서로 알려주었다며 고마워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망각이란 불편하지만 필요불가결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하느님이 인간에게 망각이라는 선물을 주지 않았다면 인간이 어떻게 살아갈지. 그 많은 복잡한 사건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다 기억하고 산다면 아마도 제정신으로 살아갈 사람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뇌는 들어오는 정보를 일정 기간 저장해 두지만, 새 정보가 들어오면 새 정보를 저장하기 위해 먼저 들어온 정보는 망기한다. 이렇게 뇌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땐 기억창고에 오래도록 저장해 두어야 할 소중한 정보도 버려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느 것은 빨리 잊고 싶은 사건인데 야속하리만치 끈적하게 달라붙어 지워지지 않고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도 있다. 

휴게소 화장실에 현금 지갑을 두고 왔다느니, 이사하는 날 자동차 지붕 위에 돈 가방을 올려놓고 달리다가 날려버렸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 혀를 찼다. 그건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찬찬치 못 한 생활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비난의 화살을 쏟아부었다. 그러던 내가 요즘 깜빡 증에 걸렸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도 잊어먹고 깜빡깜빡한다. 

내 일에 열정을 쏟고 바쁘게 살고 있으니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며 자신만만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 건망증이 심히 불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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