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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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90)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3.03.09 11: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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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거 아세요? 어머니와 가까운 아파트 할머니들이 어머니를 너무 부러워들 하셨다는 것을요. “무슨 복이 있어 저렇게 잘 생기고 멋있는 할아버지와 사 느냐고들 하셨대요. 어머니께서 그때만큼은 우쭐하셨겠지요? 그러니 어머니께서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멋진 할아버지와 매일 데이트도 하고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으셨겠어요?

저는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웃음이 나오지요. 아버지께서 「상말속 담사전」을 출간하시자 사전 중에 제일 인기가 있고 많이 팔리고 인터뷰 요청도 많았을 때였지요. 

어머니께서는 화가 나셔서 제게 “나는 느 이 아버지 때문에 이 아파트에서 남부끄러워 못 살겠다. 챙피해서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온갖 상스러운 말들을 모아 책이랍시고 써서 그걸 갖고 노인네가 인터뷰한다고 부산을 떠니 내가 당최 망신스러워서 동네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그 상말속담사전 파쇄해 없애라고 대판 싸웠다.” 저는 깔깔대고 웃었어요. 어머니 말씀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지만 “상말속담사전이니까 그럴 수밖에요. 그러려니 하세요. 신경 쓰지 마시고요.” 라고 말씀드려도 어머니 마음은 풀리지 않았었지요. 

그런데 속담사전 중에 제일 많이 팔려 인세도 가장 많이 받았다는 말씀에 저도 웃고 말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밤잠도 주무시지 않고 쓰신 속담사전들은 나중에 크게 화제가 되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장이 집으로 아버지를 찾아와서 “선생님께서 집대성한 속담사전 시리즈는 우리나라 문화유산으로 후세에 남겨줄 자산가치가 크니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가 CD-ROM으로 제작하여 영구보존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는 정중한 요청에 아버지께서는 쾌히 승낙하셨지요. 아버지께서는 고려대는 친손자, 외손자 셋이 다 고려대를 나왔으니 고대에 기증하는 것이 그런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으셨다고 하셨지요. 

어느 날 제가 집에 들렀더니 거실에 웬 낯선 손님이 계셨어요. 아버지께서는 ‘신영복’이라는 분을 수형생활을 하는 동안 아버지를 부모처럼 위하고 따랐던 분이라고 소개해주셨어요. 그분은 제게 “선생님은 수형생활 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존경했던 분이셨습니다. 저도 그중의 한 사람으로 선생님을 존경하고 도움도 받고 지냈었기에 제가 출소하면 꼭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어 오늘 이렇게 찾아뵌 것입니다.” 저는 겸손한 분이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안방으로 들어 갔었지요. 

그런데 나중에 얘기하고 보니 신영복이라는 분은 오빠와 이서방과는 서울대 상대 동문으로 이 서방과는 동기이고 오빠는 2년 후배로서 대학 시절 상대 신문도 같이 만들고 문학의 밤, 음악의 밤, 미술의 밤 등 다양한 행사도 함께 하며 지낸 가까운 선후배였어요. 아마 그 분도 우리 오빠처럼 글쓰기, 음악, 그림 그리기 등 다재다능한 재주가 있는 분인가 보다 생각하고는 잊고 지냈지요. 그런데 2년 전 놀라운 일이 있었어요.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신영복’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소스라칠 만큼 놀랐지요. 우리 아버지를 존경한다며 우리 집까지 찾아왔던 그분을 우리나라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니 순간 어찌 제가 놀라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버지께서도 지금 생존해 계신다면 저처럼 많이 놀라셨겠지요?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제게 “니 아버지는 요즘 언제나 지방 출장을 가신다. 아침 일찍 007 가방을 들고 나가신다. 내가 모를 줄 알고 매일 출장 간다 하시지만 나는 다 알고 속아준다. 무슨 사진을 찍어 와서 방에 들어가서 인화를 하고 사진을 늘어놓은 것을 보면 또 무슨 책을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하셨지요. 아버지께 여쭤보니 “니 어머니가 이제 내가 책을 쓴다면 넌더리를 내서 어머니 몰래 송시열 붓글씨 모음집을 출간 하려고 전국 방방곡곡 유적지와 사찰을 찾아다니며 우암 선생의 붓글씨를 사진 찍어 모아 글과 함께 책을 내려고 한다.”는 말씀을 들었지요. 

저는 아버지께서 자손으로서 뿌리를 찾기 위한 노력까지 하고 계심에 또 한 번 감탄했지요. 아버지께서는 평소에도 우암 송시열 선생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사셨으니까요. 

조선시대를 통틀어 중국으로부터 공자, 맹자 반열에 子호를 붙여 宋子라고 공식 인정을 받은 대학자는 송시열 한 분밖에 없다고 하셨지요. 팔십이 넘은 연세에 카메라를 들고 젊은이도 힘든 전국 투어를 하시며 찍어온 사진을 손수 인화해보고 맘에 안 들면 그 먼 산골을 찾아 그 붓글씨를 다시 촬영하여 송시열 붓글 씨 모음집을 발간하심으로써 우암 자손으로서 큰 공헌을 하셨습니다. 

시간을 소중하게 사셨던 이유도 있었지만, 아버지께서는 저희 집 바로 한 동 건너 사시면서도 18년 동안 단 한 번도 딸인 저희 집에 오셔서 식사 한번 하신 적이 없는 아버지셨어요. 연세가 드시면서 큰 키에 유난히 긴 다리가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저희 집에 일 년에 딱 한 번 들르시는 날이 있었지요. 5월 5일 어린이날, 그날마저도 현관에 서신 채로 “오늘이 어린이날이잖니? 애들 용돈이나 좀 주려고 왔다.” 하시며 하얀 봉투를 건네시고는 “나는 갈란다.” 하시고 현관문을 나서는 아버지셨습니다. 평생 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식들한테도 눈꼽만한 폐도 끼치지 않으려 너무나 독립적으로 사시는 아버지가 때로는 대단하고 가끔은 섭섭할 정도였지요. 어머니의 병환으로 10년이 넘게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사셨어도 자식들에게 단 한 번 전화로 도움을 청하신 적 없이 혼자 입원시키시고 퇴원을 하셨지요. 때로는 너무나 속상해서 “자식 두었다 언제 쓰려고 연락도 안 하시고 아버지 혼자 그 애를 쓰시냐.”고 하면 한결같은 아버지의 대답은 “너네들 다 바쁜데 뭐하러 전화해서 다들 복잡하고 힘들게 하냐. 나는 괜찮다.”였지요. 심지어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도 마찬가지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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