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구읍 애국계몽운동가 오상규 선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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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구읍 애국계몽운동가 오상규 선생 (3)
  •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장
  • 승인 2024.06.07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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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와 평안도 학교설립운동 활약

괴정 오상규 선생은 1905년 강화군수를 끝으로 관직에 물러나서 을사늑약으로 자주권을 상실한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을 목적으로 한 애국계몽운동으로 학교설립운동과 국민계몽운동을 적극 펼친다.
그는 당시 함경도 관북 지방의 선각자인 이준(李儁), 이동휘, 이종호, 유동열 등과 함께 한북흥학회를 주도하였고 관서 지방인 평안도의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통합하며 북한 지방 통 털어 대표적인 애국 계몽단체인 서북학회에서 이준, 이동휘, 안창호, 안중근, 이갑, 유동열 등과 애국계몽운동과 학교설립운동에 적극적 참여한다. 
이와 함께 도산 안창호가 주도하는 ‘흥사단’에 많은 재정적 후원 등으로 대한제국의 실력양성과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선 선각자이다.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는 1906년(광무 10년) 10월에 이준 열사, 오상규, 유진호, 설태희 선생 등이 발기하였고 오상규 선생이 초대회장이 되어서 주로 서울에 거주하는 함경도 출신 인사들인 신지식인과 신흥 시민층, 중하급 관료와 무관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학교 건립 주력, 애국심 고취

한북흥학회는 초기에 국권회복을 위한 신교육의 필요성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우는 데 주력, 1907년 1월 사범학교 속성과인 한북의숙을 설립했다. 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국사, 세계사, 지지, 지문, 물리, 수신, 교육, 법률, 경제, 산술, 체조 등 애국주의에 입각한 교육을 하였다.
 그리고 인력 양성과 민중 계몽운동을 전개하여 이준(李儁), 이동휘(李東輝), 이종호(李鍾浩), 정진홍, 강윤희 등이 강연에 나서 일제의 침략성 폭로, 조국부흥, 완전독립, 민권사상 등의 내용을 강조하였다. 이 같은 지방 순회강연과 계몽운동을 통해 대중을 일깨웠다. 즉 일반 민중(民衆)들에게 학교설립 등 신교육의 참여를 촉구하고 계몽 활동을 통해 민중의 애국심을 고취시켜 민력을 양성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함경도 지방순회, 지회설립 독려

그리고 중앙조직이 완비되자, 좀 더 활동을 민간 차원에서 활발히 전개하려고 전국에 걸쳐 지회 및 지교 설치에 힘을 기울였다. 오상규 회장과 이동휘(후 상해임시정부 국무령) 선생 등은 1907년 3월부터 지회설립을 독려함과 동시에 독립운동가 이종호 선생(건국훈장 독립장)과 함께 함경도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신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학교설립을 촉구하였다.

 

■서우학회 학생친목회 서울 대운 동회비용 오상규 선생 전담

한편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함께 청년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학리토론, 지식교환, 국권회복의 취지로 서북학생 친목회를 만들어 미래의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이에 대해 『대한제국기의 애국계몽운동과 사상』에서 이송희 교수는 “서북학생친목회 대운동회는 “1907년 5월 12일 서울 동대문 밖 삼선평에서 열렸는데 대성황을 이루었고 운동회의 비용을 오상규 선생이 전담했으며 준비는 서우학회 · 한북흥학회가 맡아 하였다. 이 때 안창호선생은 이 운동회에 참석한 학생과 민중을 상대로 연설했다”고 언급하였다.
계몽 강연, 토론 활동을 통해 일반 민중을 계몽하고 애국심을 고취 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이던 한북흥학회는 그 후 평안도와 황해도 중심의 서우학회와 통합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로 개편하게 되었다.”


■안중근 서우학회 서울 대운동회 참석

그리고 오영섭 교수는 『안중근과 그 시대』에 실린 「안중근의 정치사상」 논문에서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1907년 5월 안창호, 이갑, 유동열, 노백린, 이동휘, 이종호 선생 등과 함께 서울 동대문 밖 삼선평에서 열린 서우학회 친목회에 참석했다”고 수록하였다. 또 안중근 의사는 “해외로 망명하기 직전에 서울에서 김종한, 민형식, 김세기, 이종권, 유종모, 안창호, 강영기, 이동휘 등 서북학회 인사들 및 일부 전직 고관들과 교유하였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서북학회는 최익현 의병장이 순국하자, 의연금 모급운동을 전개했고 재정지원자인 이용익 군부대신의 죽음이나 헤이그 밀사 이준 열사의 분사(憤死)에 대해서도 운동대책을 협의하는 등 현실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이런 일련의 활동 결과, 1907년 중엽에 이르러서는 평안도 관서 지방과 함경도 관북 지방에서 계몽운동이 국민적 뿌리를 내려 각 지방의 사립학교가 설립되고 계몽운동가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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