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 보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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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빈 보따리
  • 김정자 수필가
  • 승인 2016.11.03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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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 엄마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보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간절해진다. 그날 새벽, 아직 꿈속을 헤매고 있을 때다.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리는 동생의 전화였다.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려워하고 있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병원에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다며 퇴원을 종용했다. 집으로 모시고 온 후부터는 밤에 전화만 와도 두려웠고, 밖에 나가 있어도 늘 불안했다. 그러면서도 사는 게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만약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면 엄마는 모든 일을 제치고 내 병실을 지켜 주었을 것이다. 나는 엄마가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어도 친구들을 만나기에 바빴고, 때로는 엄마가 병원에 계신것조차 잊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하도 마음이 아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다.

엄마는 스무 살이나 나이차가 있는 아버지와 재혼을 하고 첫딸로 나를 낳으셨다. 그 이후 닥치는 대로 남의 일을 도와주며 그 대가로 농작물을 받아와 생활했다. 가끔은 일 하러 갈 때 나를 데리고 가서 점심을 얻어 먹이기도 했다. 철없던 나는 엄마를 따라 붉은 황톳길을 걷다보면 맛있는 점심을 먹을 생각에 마치 소풍이 라도 가는 것처럼 즐거웠다. 밭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면 해가 기울 즈음 일한 대가로 고구마랑 푸성귀를 준다. 그것을 작은 손으로 엄마를 도와 날라 주는 게 그날 점심을 얻어먹은 나의 임무였다.

저녁에 집 앞 골목에서 엄마를 기다리다 보면, 저 멀리서 보따리를 이고 오는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반가움에 달려가 엄마 손을 잡고 오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가로등 불빛이 밝았다. 엄마는 불빛에 싸여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저 낙엽이 돈이라면 우리 딸 고생시키지 않아도 되는데’ 라고 말했다. 이미 길 위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나는 그때 엄마한테 ‘저 낙엽이 쌓인 만큼 돈 벌어서 엄마한테 효도 할게’ 라고 말했다.

건강하고 부지런했던 엄마의 몸은 한해 두 해 태산이 무너지는 듯 가라앉아 갔다. 그러다가 결국 쓰러져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엄마의 병명은 췌장암이었다. 순간 어안이 벙벙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고생만 한 엄마를 생각하니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엄마를 부둥켜안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린양이 하듯 엄마의 가슴을 만져보았다. 보따리를 이고 다니면서 우리 남매들에게 모든 것을 다 내주어서 그런지, 엄마의 가슴은 텅 빈 듯 쪼그라져 있었다.

어머니는 입원해 계시는 두 달 동안 자식들에게 강한 의지력을 보여주었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우리는 어떠한 병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끝내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고야 말았다. 급작스런 이별에 여러 사람들의 조문을 받으면서도 어떻게 슬퍼해야할지조차 몰랐다. 정말 돌아가신 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입관식을 할 때다. 나는 엄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내 손의 온기로 따스하게 해드리면 다시 눈을 뜨고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관을 하는 날, 엄마는 영정 속에서 오늘이 무슨 날인 줄도 모르고 환하게 웃고 계셨다. 한참을 울다가 잠시 눈을 감았는 데 겨울 햇살이 내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갑자기 손톱을 깎아주던 시골 마루가 생각났고, 돈이 낙엽처럼 쌓이기를 바라셨던 어릴 시절이 생각났다. 순간 어떤 깨달음이 나를 스쳐지나갔다.

그렇다. 엄마와 함께 지낸 세월은 가난했지만 그 안에서 행복했다. 살아가면서 너무 힘이 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 엄마를 생각하면 희망이 보였다. 가난했던 시절 오직 자식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애쓰셨던 그 은혜를 생각하면 힘이 났다. 지금은 먼 곳에 계시지만, 어머니는 늘 내 곁에서 희망이란 이름으로 함께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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