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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의 풍수적 마을 유래(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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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의 풍수적 마을 유래(7)
  • 황동연 충청현공풍수연구원장
  • 승인 2017.02.09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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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의 입수되어 들어온 맥은 보은 속리산에서 팔음산을 경유해서 들어온 맥으로서 청산과 청성, 안내, 안남이 한맥이고, 덕유산에서 대둔산을 경유하여 서대산과 장룡산으로 들어온 맥은 옥천읍과 이원면, 군서면과 군북면 동이면의 맥이 다른 것이다. 지난번의 죽향리 다음으로 교동리에 대해 소개 한다.

교동리(校洞里)는 원래 읍내면 향교리(鄕校里)와 고수동리(高樹洞里)에 속해 있던 마을로서 두 마을이 합하여 옥천읍(沃川邑) 교동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고수동리는 구읍 저수지 쪽으로 올라다보면 높게 보이는 곳에 있기 때문에 고수골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교동리(校洞里)라 부르게 된 것은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지방의 영재를 기르기 위한 향교(鄕校)를 세웠고 대성전(大成殿)은 세종 22년(1440)에 건립하였다. 대성전(大成殿)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여 종6품의 교수와 정9품의 훈도(訓導)를 두었으며, 정부로부터 5∼7결(結)의 학전(學田)을 지급받아 거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유지비용을 충당하였다. 대성전에는 동,서 양무가 있으며 공자를 주향으로 중국의 선현들과 중봉조헌, 우암송시열 등 유림들의 위패를 모셔놓았다.

처음에 향교리(鄕校里)라 부르다가 교동리라 하게 되었다. 향교 앞에는 조선시대 충신의 묘역이나 향교 앞에 세워 경건한 마음자세를 가지도록 했던 하마비가 세워져있다. 옥천향교(沃川鄕校)의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로 앞에는 유교 교육을 위한 강당(講堂)인 명륜당(明倫堂)과 학생들의 거처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고 중간에는 내삼문(內三門)을 두었고, 그 뒤편에는 문묘(文廟)인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있어 공자(孔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봄,가을로 제향을 받들고 있다.

특이한 것은 향교의 내삼문이다. 삼문이 합쳐진 문의 형식이 아니고 세 문 모두 일정 거리를 유지하여 별개의 문으로 내었다. 삼문의 가운데에 문을 ’정문‘이라고 하고 양쪽 문을 협문이라 한다. 보통 때는 양쪽 협문만 열어 놓고 정문은 닫아둔다. 제사를 지낼 때는 세문을 다 열어놓지만 정문은 영혼이 들어오시는 문이라 하여 사람들은 드나들 수 없고 협문만 사용하는 것이 법도로 되어 있다. 향교(鄕校)는 성균관(成均館)의 하급 관학(官學)으로서 각 지방관청의 관할 하에 있던 조선시대의 지방교육기관이다. 옥천군(沃川郡)은 이러한 향교(鄕校)가 교동리(校洞里)와 청산면(靑山面)의 두 곳이 위치하고 있다는 교육의 자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다.

명륜당(明倫堂)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2층 팔작지붕의 맞배집이고 이 건물은 누각(樓閣)형식으로 1층은 모두 개방된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전면 중앙 1칸이 문으로 되어 있다. 명륜당(明倫堂)은 지방의 영재(英材)를 수용하여 윤리도덕(倫理道德)을 강론하고 학문을 연구하던 최고 학교로서 교화(敎化)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 홍도당(弘道堂)과 고직사(庫直舍)등 부속건물이 있다. 교직사를 한자로 ‘교직(校直)‘이라 하여 ‘고직‘ 이라고도 한다. 고려, 조선시대 공자를 향사하기 위해 지방에 세워진 문묘(文廟)이자 서울의 성균관(成均館)과 더불어 지방교육(敎育)을 담당했던 향교(鄕校)에는 시설물 관리와 문묘(文廟)에서 시행하는 제향(祭享)에 따른 여러 가지 잡무를 맡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을 교지기라 불렀으며, 이들이 거처하였던 곳이 고직사이다. 옥천향교는 성균관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유사한 건물 배치를 지녔다. 가장 앞쪽에는 목조 기와 건물로 명륜당이 있고 서쪽에는 서재, 동쪽에는 동재로 고직사가 있으며, 내삼문을 통과하면 대성전과 이를 중심으로 동무와 서무가 있다. 매년 2월과 8월 상정일(그달 맨 먼저 일진에 ’丁‘자가 들어가는 날)제사를 지내고 있다.

향교 옆에 위치한 육영수여사 생가는 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313번지이다. 육영수여사의 부친이신 육종관 옹(陸鍾寬 翁)은 이 집이 명당인줄 알고 자기 재산의 절반을 주고 사들인 곳으로 건축물대장에 의하면 1894년 최정부에 의해 158.99㎡(48평)로 신축되었으며, 토지 대장에 의하면 대정(大正) 2년(1914년) 3월7일 민 영기(閔 泳綺)소유이던 이 가옥은 대정(大正) 6년 (1918년) 8월 13일 청성군 능월리 육종관의 소유로 이전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교동(校洞)집을 삼정승(三政丞)의 집이라 불렀다.

1600년대의 김정승, 이어 송정승 그리고 민정승으로 3백년이나 묵은 고가를 육여사의 아버지는 민정승의 자손 민대감한테서 1920년대에 2만5백원에 사들였다. 가옥의 규모는 후원의 과수원을 합치면 7~8천평으로 순수한 대지만 3천여평이 (현제 토지대장등본에 의하면 6407㎡ 약 1940평) 넘었고 이 넓은 터전에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고가가 교동집이였다.

조선 상류계급의 건축 구조물을 대표하는 서울의 비원의 연경당과 맞먹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옥을 인수한 후 99칸집, 아홉 대문 집 등으로 불려 졌던 대저택과 같이 건물의 높이를 높게 건축하였다고 한다. 옥천의 진산(鎭山)인 장령산에서 좌청룡과 우백호로 나뉘어져서 우백호가 도덕봉(道德峯)-산바래기산(198m)에서 나분티재를 거쳐 육영수 생가의 주산인 마성산(馬城山409.4m)이 만들어져서 일자문성의 토성의 기운을 받아 육영수여사의 국모가 탄생 되었다. 나분티재에서 속기하여 용세(龍勢)가 머리를 돌려 장령산의 진산을 향해 돌아보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의 마성산을 만들었는데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이란 용신이 몸을 돌려 조산(祖山)을 돌아보듯 결혈(結穴)된 것을 말한다.

마성산의 산세는 서남쪽으로 개장(開帳) 천심(穿心)하여 힘차게 뻗어 내린 용맥은 과협(過峽)에서 기를 속기(束氣)하고 굴곡(屈曲) 박환(剝換)하여 서쪽으로 기와지붕과 같은 모양의 토형산(土形山)인 일자문성(一字文星)를 맺고, 다시 좌출맥(左出脈)한 용맥(龍脈)은 과협(過峽)을 지나 박환(剝換)하여 래용(來龍)을 수려(秀麗)하고 유연(柔軟)하게 뻗어 생기(生氣)를 결속(結束)해 동남쪽에 한 봉우리를 맺는다.

여기서 개장 분맥(分脈)한 간룡(幹龍)은 서쪽으로 행룡(行龍)하여 후덕(厚德)하고 길게 뻗어 오른쪽으로 감싸고 돈 山盡水廻處에 혈을 맺은 육영수생가터이다. 안산은 아미사(蛾眉砂)가 되었다는 것은 단정청수(端正淸秀)한 것은 문장,명예,장원,여귀한다. 형국론에서는 주산인 木星을 사람으로 보고, 안산 아미사(蛾眉砂)로 거울로 볼 수 있으므로 예쁜 여인이 곱게 화장하는 형국으로 옥녀단장형(玉女丹粧形)과 목형산의 옆에 일자문성이 약간의 경사가 진부분이 말의 등부위로 보고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부분은 주산에서 내려오는 래용에 해당하는 부분에 고압선 철탑이 설치되어있고 안산의 아미사에 해당하는 부분이 훼손이 되어가는 것에 대해 다소나마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하는 바다. 결론적으로 교동리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으로 좋은 풍수적인 입지조건을 갖춘 마을이지만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줄 필요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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