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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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들판
  • 김정자 수필가
  • 승인 2017.02.0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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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바랜 겨울 들판은 고즈넉하기만 하다.

간혹 들판에 살포시 내린 서리나 눈으로 색조 화장을 해 보지만 곧 민낯을 드러낸다.

허허 벌판이라서 생명을 잃은 것 같아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수확에서 이어진 휴식의 한가로움을 느끼게 한다. 농사를 짓는 시골에서 자연을 벗 삼아 어린 시절을 보낸 기억을 더듬으며 논둑길을 어슬렁어슬렁 거려 보았다. 지금은 아파트에 살면서 논둑길을 걷는 게 다소 어색한 조화 같지만 이같이 두 가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건 시골에서 태어난 행운이다.

텅 빈 들판을 지나며 농사를 지었던 아버지 엄마를 가만히 생각해 본다.

논에서 일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 텅 빈 들판처럼 외롭고 쓸쓸한 모습이었다.

엄마가 일하시는 밭에는 등장인물들부터 풍성 했다. 고추, 파, 마늘, 참깨, 들깨, 콩, 가지, 토마토, 고구마, 감자, 호박, 무, 배추 등등은 길게 외줄로 늘어선 벼 포기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들로 제각기의 색채와 모양과 특질들을 가지고 있다.

사람도 제각기 특성을 갖고 태어나 특유의 멋과 인성을 자랑하는 것처럼 식물들도 제각기 서로 다른 매력과 느낌을 갖고 있다. 어린순들은 구분하기 곤란하지만 엄마의 손길로 자라면서 모양도, 키도 제 각기 달라지게 마련이다.

마치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는 것처럼 잎이 나서 꽃이 피는 시기, 결실을 맺어 거둘 때 까지 엄마의 손길이 필요 했다. 엄마가 잘 가꾸어온 밭에 가면 조명과 의상을 제대로 갖춘 한편의 화려한 뮤지컬이 펼쳐지고는 했다.

비로소 조명이 꺼지고 출연진이 사라진 휑한 들판을 보고나서야 그 풍요의 정체는 풍성함이 아니라, 지금은 그리운 모습으로 비춰지는 아버지, 엄마의 사랑이었음을 알게 된다.

수확의 풍성함을 모르고 굵은 주름이 움푹 팬 늙은 호박은 말라서 가늘어진 줄기를 힘겹게 붙들고 있다. 무거운 열매를 업보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감나무는 손길이 닿지 않은 흔적으로 마음을 무겁게 했다.

분명 수확의 설렘을 안고 씨를 뿌리고 가꾸었을 텐데 왜 저들은 마지막 수확을 잊고서 고단한 몸을 들고 서 있어야 하는지 저마다의 특별한 사연이 있겠지만 아무 말이 없다.

어느 날, 그러한 느낌들이 삶속에서 느껴지는 고단한 삶의 무게와 같다고 느껴지는 것이 무리한 감정인가 살며시 들여다보게 한다.

홀로 휑한 들판에 앉아 담배 한 대 물고 숨을 고르던 아버지도 그때는 말이 없었고,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말했다. 관심과 애정으로 사랑하며 가꾸다 보면 저들도 다음 생명의 잉태를 도와 다시 태어나겠지만 떠나는 저들은 바쁘기 만하다. 바빠서 한숨을 푹 내쉬는 순간 겨울이 가고 들판의 색은 원래의 색을 되찾기 시작하고 지나간 모든 것들은 지나간 만큼의 의미를 전할 것이다.

어느 덧 봄을 알리는 입춘이 지나서인지 봄기운을 가득 담은 햇살이 바람을 타고 와서 빈 나뭇가지에 입맞춤한다. 봄이 성큼 눈앞에 다가 선 듯싶은 2월의 한나절, 한껏 곁에 다가온 분홍빛 미소는 벌써부터 마을을 설레게 한다. 따스한 봄날이 오고 오곡이 무르익는 계절이 오면 그때야 또 돌아오려는지 빈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곳이 논 이었다는 사실이 전혀 믿겨지지 않는다.

들판이 그리운 건 아직도 고향의 품에 목마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왠지 휑한 들판이 쓸쓸하기도 하고 텅 빈 가슴이 시리기만 하다.

1년 중 가장 짧은 2월, 어찌 하다 보면 후딱 지나가버리고 말 것 같은 계절이지만 다시금 봄의 햇살을 찾아 여행을 꿈꾸다보면 왠지 모를 설렘에 가만히 빠져들며 다가올 3월의 무서운 꽃샘추위를 걱정하게 하는 현실에 가만히 안겨본다.

정유년 다 살아보지 않았지만 앞으로 얼마나 좋은 일이 있을까 생각해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관심과 애정으로 사랑하며 짧은 2월,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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