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민담
요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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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민담
요녀석
  • 조도형
    (사)옥천향토사연구회원
  • 승인 2017.02.16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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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을 혼낼 때 “이 녀석” 또는 “요 녀석” 하고
호령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의 어원은 전설적이기는 하여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때는 조선 인조 14년인 1636년 12월 2일 청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심양을 출발, 조선을 침공하여 쳐들어오자, 인조는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등 두 왕자를 비롯한 비빈종실(妃嬪宗室)과 남녀 귀족들을 우선 강화로 피난시키고 왕자 소현세자와 신하들은 미처 피난을 못하고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청태종은 16일에 남한산성을 포위하여 산성은 완전 고립상태에 빠졌다.
성내의 군사는 1만2천여 명 이었고 식량 1만 4천석이 있어, 50여일의 보급이 가능할 뿐이었다.
포위 된지 45일에 식량은 떨어지고 추위로 말미암아 성내의 장병은 거의 기력을 잃고 원군은 도중에 청군에 격파 당하므로 이에 성안에서는 마침내 성을 열고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왕은 처음에는 주저하였으나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자 부득이 1637년 정월 30일 성문을 열고 왕세자와 함께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에서 항례(降禮)(삼배구고두
三拜九叩頭 :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조아린다는 뜻)를 청태종에게 드리는 치욕인 일을 당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왕자는 인질로 청나라 심양에 잡혀가 8년간이나 머물러 있었다.
이렇게 되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몽골어도 배우고 서역원정에 출전도 하였으며 천주교 선교사 아담샬과 친밀하여 천문과학에 관한 서적, 지구의, 천주상 등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런데 여기에 기록되지 않은 야사(野史)가 있는데 청나라 황제가 8년 간을 청나라에서 생활하다 돌아가는 두 왕자를 불러서 떠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할 말 있으면 하라고 하자, 소현세
자는 청나라 황제가 사용하는 벼루, 즉 용연(龍硯)을 달라고 하여 그것을 얻게 되었고 봉림대군은 청 황제에게 아뢰기를 “나는 모든 것이 필요 없습니다,
다만 나와 같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온 모든 우리나라 백성들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라고 말하자 청나라 황제가 “조선국의 세자는 큰 임금이 될 수 없는 사람인데,
봉림대군은 큰일을 할 사람 같다 ” 라고 감탄하였다 한다.
그 후 두 왕자는 귀국하여 인조(仁祖)가 왕자에게 묻기를 “청나라에서 얻은 선물이 무엇이냐”고 봉림대군에게 묻자 봉림대군은 말하기를 “얻은 선물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저와 함
께 볼모로 잡혀갔던 백성들과 돌아오기를 간청하여 같이 왔을 뿐입니다.”
라고 말하였고, 소현세자는 인조에게 아뢰기를 “저는 청나라 황제가 가장 아끼는 이 용연을 얻어 왔습니다.” 하면서 벼루를 인조에게 드리니 왕은 하도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고 한참 앉아 소
현세자를 내려 보다가 “무엇! 용연석?”하면서 벼루를 소현세자의 머리를 향해 던져버렸다.
이때 벼루가 소현세자의 머리에 맞아 이로 말미암아 귀국 후 두 달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 혼을 내는 말로 “용연석!” 이라고 호통 치던 것이 점점 이 말이 변하여 “요 녀석” 또는 “이 녀석”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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