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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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기
  • 옥천향수신문
  • 승인 2017.03.3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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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주년을 맞은 옥천향수신문 가족들이 개성을 담은 톡톡 튀는 입담을 풀어놨다. 본란은 신문 취재 시 겪었던 일화들, 신문을 만들면서 반성해야 할 점, 보람을 느꼈던 일화 등 다양한 취재 후기를 싣는다. <편집자주>

 

옥천향수신문(대표 최장규) 임직원 7명이 지난해 2월 2일 옥천군장학회에 100만원을 기탁했다. 사진은 전달식 이후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한 돌 맞은 옥천향수신문 파이팅

편집국장 천성남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듯 그렇게 옥천향수신문은 태어났다.

향토인 10인의 열망이 뭉쳐 만들어낸 옥천향수신문은 이제는 공인(公人)으로서 당당히 옥천지역에 이름을 올렸다.

처음에는 개인이든 단체이든 간에 어떤 부탁을 하든지 거절당하기 일쑤였고, 이름을 물어도 당연한 듯 가르쳐주지 않을 때도 있었다.

취재할 때에도 거듭해서 “옥천향수신문입니다”를 연발해야 했고, “어디에서 왔어요?”라고 묻는 일이 다반사였다.

겨울에 창간을 해 봄을 맞았고… 또다시 새로운 봄을 맞고 있다.

봄은 봄인데 처음의 그 봄하고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새 봄이다.

이제는 모든 것이 제 옷을 입은 것처럼 잘 맞게 되고… 그러나 아직도 서투르고 고쳐야 할 것이 많지만… 그래도 완연한 봄의 푸른 싹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다.

톡톡 물오른 꽃눈이 마치 아름답게 활짝 피울 미래의 꽃을 예견하듯 그렇게 푸른 미래를 꿈꾸고 있다.

한 돌을 맞은 옥천향수신문에 국회의원, 도지사, 교육감 등등이 서면으로 창간 인사를 보내왔다. 대단한 발전이다. 그렇지 않은가.

열심히 노력해온 전 직원의 바람대로 옥천향수신문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고 있다.

옥천향수신문을 통해 “고맙다”를 연발하게 한 ‘내 소원을 들어봐’ 코너는 86세 된 어르신 4명이 민속촌으로 여행을 떠나 행복을 만끽하고 돌아온 이야기, 장애인사업장에서 일하는 장애인훈련생 21명이 40인분의 고기를 먹고 행복해 했던 이야기, 이주여성가족들이 에버랜드로 여행을 다녀왔던 이야기 등등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앞으로 옥천향수신문 가족이 미래의 어떤 그림을 그려갈지 주목된다.

 

다시 돌아온 윤실장!

기획실장 윤주원

가정에서 10여 년간 4자녀를 키우며 살아온 나. 사회에 나와 도서관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던 나에게 어느 날 한 지인으로부터 신문사 직원에 응시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집 근처이기도하고 언론사라는 업종이 멋있어 보여 면접을 보고 입사를 하게 되었다. 각자 톡톡 튀는 개성의 소유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옥천향수신문사. 퇴근 후에는 술 한 잔 기울이기도 하며 즐거운 회사생활을 시작했는데 창간호가 나온 이후 모든 면이 달라졌다.

보조업무를 해주는 분이 있었지만 경영업무를 처음 접해 본 나는 어려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부족한 내가 혼자서 신문사 회계, 독자관리, 광고업무까지 도맡아 하다 보니 퇴근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가정의 불화는 심해져갔다. 워킹맘이면 누구나 하는 고민이겠지만 아이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지나치게 자유분방해졌으며,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친정엄마와 언니는 많이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신문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창간멤버로서 신문사를 등지고 나가는 것에 대한 미안함도 컸지만, 가정일 또한 중요했으므로 결정한 사항이었다. 그렇게 신문사를 나와 두 달간 다른 곳에 일하면서도 신문사가 경영쪽에 어려움을 겪고 있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현실도피보단 어려움을 극복해보자는 생각으로 다니던 직장에 양해를 구하고 다시 돌아왔다.

다시 돌아왔으니 퇴근시간을 앞당겨보자고 마음먹었지만, 다시 3개월이 지난 지금 난 여전히 야근을 하고 주말에 나와 일을 하고 있다.

1년이 지난 지금 이제 뭔가 감이 잡히는듯하다. 점차 발전되는 모습으로 회사에 보탬이 되는 인물이 되었음하는 바램이다.

 

비누향

취재기자 유정아

나는 인위적인 향기보다 아침에 샤워하고 살에 옮긴 비누향이나 젖은 머리칼에서 풍기는 샴푸향처럼 은은한 향기를 좋아한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생동감이 느껴지는 그런 향, 또는 그런 맛이 좋다.

내 기사도 그런 기사를 추구한다.

때문에 명확하게 드러나는 한 가지 문제가 아닌 집행부와 의회의 보훈수당 발의, 군부대와 주민간의 소음문제 등 첨예하게 다른 주장이 오고가는 기사를 쓸 때면 나홀로 외줄타기를 하는 심정으로 글을 쓴다. 글자 사이사이에 아직 지우지 못한 향이 있을까 끊임없이 확인한다.

양념이 가득 들어간 양측 주장에 사실만 건져내 기사를 선별하는 작업은 정말 힘들지만, 적어도 내가 쓰는 기사는 내가 아닌 독자들이 판단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간혹, 이런 나에게 자극적인 향을 요구하는 독자들이 있다. 내 기사에서 어떤 향이 나는지 명확하게 구분하고 싶어 한다. 그도 아니면 양측을 대변해주는 받아쓰기 기사냐고 비아냥대는 물음도 들려온다.

두 입장을 골고루 담아 당시 상황을 생동감 있게 전하고 싶을 뿐인데, 그 어느 쪽에도 좋은 소리 못 듣고 양쪽에서 ‘왜 상대방 입장만 좋게 써줬냐’는 항의전화만 온다.

그렇게 너덜너덜 해진 흉에서 새살이 돋아날 쯤 다시 나를 할퀴고 지나가는 일의 반복이었다.

아직 1년차 기자이기 때문에 갖고 있는 오기라고 봐야할지 멋 모르는 아집이라고 해야 할지 명확한 판단이서지 않지만 아직도 어느 향에 물들고 싶지 않다.

양념을 가득 친 매운탕 같은 글 보다 신선한 활어회에 양념은 취사선택할 수 있는 그런 기사를 쓰고 싶다.

 

내겐 너무 소중한 ‘향수의 고향’ 옥천

취재기자 이창재

가을이 깊어가는 지난 해 9월 30일 새로운 인생의 기회에 도전하게 됐고, 그 결실로 옥천향수신문과의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었다.

옥천군과 옥천고용센터에서 주관한 ‘2016년 행복취업마당’에서 ‘옥천향수신문’의 2기 기자모집 부스를 보고, 무작정 이력서를 불쑥 내밀어 보았다.

부스에서 이력서 1차 심사를 하던 경영기획국 윤주원 실장의 답변은 예상했던대로 “나이가 좀 많으시긴 한 것 같은데, 일단 접수하겠습니다.”라는 반가운 소리였다.

그리고 회사에서 가졌던 2차 면접과 합격 통지로 나는 10월 10일부터 옥천향수신문 2기 기자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됐다.

그동안 살아왔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옥천향수신문 사회부 수습기자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살아오면서 몇 번의 ‘껍질 바꾸기’를 시도해 왔지만, 사실 이번 ‘탈피’ 작업은 내게 너무 벅차게 다가올 것같은 막연한 두려움도 잠시, 나는 살아남기 위해 경찰서로, 소방서로, 군청으로, 농업기술센터로 뛰고 또 뛰어야했다,

이렇게 취재를 다니며 점차로 내가 태어나고, 자라왔던 내 고향 옥천이 이다지도 아름답고, 멋있는 곳이었는가 새삼 발견하게 되고, 감격의 눈물을 수 없이 흘리게 되었다.

또 이렇게 멋있는 곳에, 이렇게 아름답고 착하고 문향과 인격을 갖춘 우리 조상들이 역사속에 살아왔고, 또 우리 이웃들이 살고 있는가 새삼스럽게 놀라는 일이 많아져 나중에는 입을 다물 생각도 잊은 채 한동안 망연자실 주저 앉은 때도 있었다.

마치 풀리지 않던 금관의 진위를 풀어내고 ‘유레카(알아냈다는 뜻)’를 외쳤던 아르키메데스처럼, 또 신대륙을 발견하고 가슴벅찬 희열을 가졌을 콜럼버스처럼 옥천에 대한 숨겨진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탄성을 저지르던 어느 날 “3개월의 수습기간을 무사히 마쳤다”고 그 동안의 기간을 격려해주는 논설주간과 편집국장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기쁘고, 또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터미널과 역, 은행, 병원, 읍사무소, 보건소, 노인장애인복지관 등 옥천 군민들의 발길이 닿는 곳에 한 주간의 옥천지역의 살아 숨쉬는 이야기가 담겨있는 –그중에는 아직은 미숙하기 짝이 없는 내 졸작 기사까지도 담긴- ‘옥천향수신문’을 배달하였다.

이제 나는 또 다시 달릴 것이다. 내 고향 옥천은 이렇게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아 숨쉬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2개월 차 신입기자의 마음의 소리

취재기자 김나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마음의 준비도 굳게 하지 못한 채 지난 1월, 겁도 없이 옥천향수신문사 문을 두드렸다. 약 1년 간 방송사에서 막내작가로 근무했던 나는 신문사 일이 어느 정도 유사하리라고 제멋대로 판단했다.

분명 비슷한 점도 있었지만 다른 점이 훨씬 컸다. 더욱 광범위한 내용을 다룰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등 ‘옥천’에서만 발생하는 현상을 알아보는 것은 옥천을 6년간 떠났던 내게 너무나도 버거운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은 또 핑계였다. 옥천에서 15년간을 살아왔던 내가 이렇게 이곳에 대해서 모르다니..... 나의 무지에 한탄했고 또 부끄러웠다. 신문을 읽고 군에서 준비하는 혹은 추진 중인 사업에 대해 공부하고 또 알아봐도 행정적인 측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내겐 힘이 부치는 일이었다. ‘도시철도’, ‘제2의료산단’ 등 지역민들에게 필요한 사업에 대해 누구보다 꿰뚫고 있어야 하는 게 기자의 업무인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내가 실망스러웠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아직도 과거에서 머물러있다. 과거의 방송작가 업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괴로워한다. ‘기자’로서의 자부심과 ‘기자’가 가져야 할 태도를 지니고 있지 않다. 백지상태로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지금 놓인 상황에 대해 내가 책임을 져야하고 살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깨달아야 한다. 옥천군민들이 지니고 있는 따뜻한 정을, 문향의 고장 ‘옥천’의 우수한 장점을 사랑해야 함을. 과거에서 머무르지 말고 나를 위해, 옥천을 위해 다시 한 번 날갯짓을 펼치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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