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미 시인 수필 '도솔암 내원궁 계단을 오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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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미 시인 수필 '도솔암 내원궁 계단을 오르면서...'
  • 옥천향수신문
  • 승인 2016.03.03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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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미 시인 · 옥천문인협회장

도솔암 내원궁 계단을 오르면서

겨울의 문턱을 막 넘어선 선운사의 아침은 뿌연 하늘로부터 시작된다.

금방 눈송이라도 퍼부을 것 같은 새벽 기운에도 도솔계곡의 바위들은 당당하게 버티건만, 가을내 찬란했던 붉은 잎들은 바람 한 점에도 서럽다.

인연의 끈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이며 오르던 돌계단이 무겁던 업보를 이제 그만내려놓으라 한다.

무엇을 위하여 여기까지 왔던가? 앞만 보고 달렸던 지난 세월들이 주마등같이 스쳐지나간다.

억겁의 세월도 기억의 강으로 흐르고 나면 찰나일 뿐인 것을, 지금 이 순간에도 버리지 못하는 사악한 욕심이 있어, 몸은 점점 더 무거워지면서 숨을 몰아쉬는 것조차 버거울 따름이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세상에 미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일은 없으며 학문도 예술도 사랑도 나를 온전히 잊는 몰두 속에서만 빛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시대를 열광하게 하는 知的, 藝術的 성취 속에서는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광기와 열정이 깔려 있었다는 정민교수의 책머리 글이 요즘 나의 화두가 되어 있다.

미치고 싶다. 뭔가에 온전하게 미치고 싶다. 나를 버리고 나를 찾고 싶다.
내원궁 계단을 오르면서도 내 머릿속엔 오로지 그 화두만이 무겁게 나를 짓누른다.

대학시절엔 연극에 미쳐 온통 내 청춘을 무대에 바쳤다. 그 때는 공부도 사랑도 늘 무대 뒤에서 나를 기다리게 했고, 나는 그 것들을 팽개쳐 둔 채, 무대 위에서 있는 시간만이 나의 열정이었고, 철학이었고, 꿈이었다고 믿었었다.

그 와중에 언제나 무대 뒤에서 묵묵히 나를 기다려 주던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결혼 이후 연속으로 사산과 유산을 겪으면서 무대를 떠나야 했는데, 지금도 남편은 내가 연극을 그만 둔 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늘 미안해한다.

하지만 나는 그 것에 대한 미련은 있을지 몰라도 후회는 없다. 그저 나를 향해 미안해하는 남편의 말 한마디에 녹아나는 어리석은 여자가 되어 있을 뿐이다.

그 이후 연극을 버리면서 문학을 얻었다. 학에 미쳐 살던 10여 년 간 나는 운명처럼 시를 써야 한다고 믿었고, 가슴속에서 이글거리는 불덩이 같은 것을 시로 토해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내가 토했던 글들이 시가 아니라 단순히 넋두리 같은 낙서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또다시 좌절하고 공황상태로 빠져야 했다.
나의 사특한 욕심의 끝은 어디에 있나??

지금 나는 무엇을 위해 이 계단을 밟고 있는가? 내원궁으로 오르는 길이 왜 이리도 멀고 힘들었을까? 내가 미쳐야 했던 것은 무엇이고, 미치고 싶었던 그 끝은 어디인가?

내 머리를 맴돌던 화두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지, 내원궁 계단 끝에서 나를 기다리던 지장보살님의 염화미소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지옥이 텅 빌 때까지 성불이 되는 것도 서두르지 않겠다던 그분에게 어리석은 중생은 그저 말없이 합장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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