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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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훈장
  • 유성희 옥천지역인권센터
    큰사랑요양병원 간
  • 승인 2017.04.13 14: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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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저걸 어째...이그그....안 돼......속지 마요...저 나쁜 x ...쳐 죽일 x ” 할머니 한 분이 얼굴이 벌개져서 부르르 떠신다. 텔레비전에선 미모의 여자가 잘생긴 남자의 곁에 앉아 야리꾸리한 웃음을 흘리고 있다. 할머니는 텔레비전을 보며 흥분한 것이다. 여기저기 침상에 누워 함께 텔레비전을 보던 할머니들은 이구동성으로 욕을 하며 종주먹질을 하기도 한다. 그중에 할머니 한 분이 더욱 화가 났다. 워커를 의지해 발을 질질 끌며 텔레비전 앞으로 나와 화면을 주먹으로 치려고 손을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편치 않은 다리를 끌고 오느라 벌써 그 장면이 지나간 것이다.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며 소리를 친다. “ 저 x이 하는 말을 믿지 말아요...거짓말이요...” 할머니는 텔레비전 상황을 실제 상황으로 착각하시고 흥분한 것이다. 자주 보여주는 재방송으로 인해 그 다음 내용을 아시는 할머니는 속아 넘어가는 배우들이 안타까워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 안달하는 웃지 못 할 광경이 벌어진 것이다.

요양병원에서 할머니들은 드라마를 보시는 것이 일과 중에 하나이다. 드라마 중에는 불륜을 저질러 가정이 깨지고 이리저리 꼬이는 내용이 많다. “우리 영감도 첩년이 있었어...” 한 분이 자신의 옛날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면 “우리 집도 그랬어...” 여기저기서 한스러운 자신의 지나온 삶의 이야기가 한숨과 함께 나온다. 할아버지가 오래 전에 돌아가셨는데도 아직도 마음에 있는 아픈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 어제일 처럼 이야기한다. 어쩌다가 이야기가 시작되면 서로들 자신의 삶을 앞 다투어 쏟아 놓으신다. 마치 한스런 삶의 이야기 배틀을 하는 것 같다. 어떻게 살아들 오셨을까? 막장 드라마를 볼 때 ‘저런 드라마가 왜 인기가 있는 거야...’ 라며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드라마가 누군가의 가슴에 묻혀 나오지 못하고 병을 만드는 상처를 불쑥불쑥 튀어 나오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오래 전에 친정에 가면 친정 엄마는 나를 붙들고 이야기를 하셨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를 했다. 이웃집에 돈을 꾸러 갔다가 거절당했다고 한다. 잘 살 때는 우리 집에 꾸러 오기도하고 잘 꾸어주기도 했던 사람이 변하더란다. 자존심이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느낌을 절절히 표현했다. 그 다음에는 시어머니에게 시집살이 했던 이야기를 했다.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양산을 쓰고 다녔던 멋쟁이 우리 친할머니가 나쁜 팥쥐 엄마 같았을 줄이야... 돌아가신 친할머니가 그렇게 지독한 시어머니인 것을 그제야 알았다. 난 무조건 엄마편이 되어 들어주고 엄마를 한없이 동정 했다. 친정 엄마는 시집간 딸에게 평생 가슴속에 상처로 뭉쳐있던 말을 풀어내기 위해 나를 붙들었다. 어느 날 주무시는 줄 알았던 아버지가 듣다못해 “그만 하고 자자...” 할 때 시계를 보면 새벽이 될 때도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아프고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던 친정 엄마는 어느 날부터 이야기 내용이 바뀌어져 갔다.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자식들의 자랑스러운 추억을 생각하며 행복했다고 이야기를 했다. 지독한 시어머니에게서도 좋았던 점들을 하나, 둘 찾아내어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친정 엄마는 차츰 변해 갔다. 이야기 내용도 아름다운 추억을 꺼냈고 얼굴 표정도 밝아졌다. 더 이상 나를 붙들고 매달리지 않으셨다. 그리고 열심히 자신의 삶을 찾아 다니셨다. 등산도 하고 수영도 배우러 다니셨다. “아이들 키울 때 힘들어도 그 때가 좋은 거야...조금만 참으면 금방 아이들이 자란단다...” 라며 아이들을 키우며 힘들어 하는 나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침상에 누워 있는 할머니들은 서로의 지나온 이야기를 자주 하신다. 그래서 웬만한 내용은 잘 알지만, 처음 듣는 듯 들어 주고 서로 동정하고 스스로 마무리 지어간다. “애들 땜에 살았지...도망가려해도 애들이 눈에 밟혀서...” 배고프고 가난한 시절 바람난 남편 때문에 보따리를 몇 번을 쌌다는 할머니는 창밖을 바라 봤다. 깊은 가슴속에 꽁꽁 숨겨 놓았던 아픈 상처들을 들추어내어 볕을 쪼이고 바람에 말려 다시 쓸어 담는 할머니들의 가슴에 훈장 하나씩 달아주고 싶다. ‘어머니들의 희생이 가정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지금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

어느새 봄이 왔다. 침상에 누워 있는 할머니들도 봄이면 진달래꽃 피는 산으로 뛰어 다녔고, 바구니를 끼고 냉이를 캐러 들판을 돌아 다녔으리라.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꽃가마 타고 시집오던 날 고운 가슴에 나무 하나 심어 놓고 열매를 기다렸으리라. 주렁주렁 열매가 달리기까지 인내하고 살아온 할머니들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 하얀 벚꽃이 바람에 날려 나비처럼 날아다닌다. 그 하얀 꽃잎을 두 손으로 모아 상처 난 할머니들의 가슴에 소복이 쌓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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