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집 보물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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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집 보물창고
  • 김정자 수필가
  • 승인 2017.04.27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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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있으면 어버이날이다.

징검다리 연휴로 여행계획과 가족들과 만남의 전화가 바쁘다.

나 역시 결혼을 앞둔 아들 녀석이 온다는 소식에 냉장고를 정리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내가 신혼이었을 때 엄마는 내가 온다는 연락을 받으면 냉장고부터 채웠다.

아버지와 둘이 사는 집이다 보니 우리 부부가 추가 되는 식탁은 큰 행사가 되었다

엄마는 평소에 잘 먹지도 않은 음식을 상에 올렸고 내 덕분에 진수성찬을 구경한다는 아버지의 농담이 어딘지 외로워 보였다.

맛있는 식사를 끝내고 남은 음식을 넣으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자리가 없었다.

그 당시엔 김치 냉장고가 없었지만 엄마는 앞마당 에다 장독을 묻어 놓고 김치를 보관했다. 그리고 남은 음식만 보관하는 두 칸 자리 냉장고였지만 두 분이 사용하기엔 그다지 불편함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남은 반찬 하나 보관할 곳이 없어서 엄마한테 “냉장고 하나 더 구입 해야겠어” 했더니 아버지는 “자리가 부족하면 내용물을 처리하면 되지” 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한 친정집 냉장고가 오늘 문득 생각났다. 엄마는 내용물을 치운다고 했지만 내가 친정에 갈 때 마다 냉장고는 변함없이 채워져 있었다. 냉장고엔 유통기한이 지난 영양제부터 간장만 남은 게장까지 우리집 먹거리 역사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보다 못한 내가 고무장갑을 끼고 소란스럽게 냉장고 정리 작업에 들어갔는데 다 쓸데가 있다는 엄마의 말 한마디에 원 상태로 돌아가곤 했다. 엄마의 냉장고는 누가 몸에 좋다고 하는 음식에서부터 자식들이 좋아 하는 것들로 꽉 채워져 있다. 아까워서 먹지도 못하고 보물처럼 보관만 해놓은 것들을 먹어 치우는 게 승산이라는 생각이 들어 냉동실부터 재료를 잡히는 대로 끄집어내서 건강식으로 가득한 밥상을 차렸다.

유년시절에 나는 엄마 말을 잘 듣는 착한 딸이었다. 엄마 말이 진리였고 법으로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머리가 굵어지며 엄마의 말을 오답으로 종종 알아채기 시작했다. 세상에 모든 것이 진리였던 엄마가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묘한 배신감을 불렀고, 방황으로 이어졌다. 엄마의 말은 거짓이었고. 또 세련되지 못하고 궁상맞은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공부해야 할 시기에 못하게 하고 공부는 아무 때나 해도 된다는 엄마의 말을 이상한 생각으로 원망했다. 하지만 다행히 나의 과도기는 짧았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고 어른이 되어서야 부처님 손바닥 위를 벗어나지 못한 엄마의 진리를 알았다. 지금 간간이 짬을 내서 공부를 하지만 철없던 그때가 사무치게 그립다. 해야 할 공부. 하고 싶은 공부가 넘쳐 나지만 시간과 체력이 따라주지 않는다. 어쩌면 때를 놓치면 할 수 없다는 철없던 생각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다보니 지금 두 아들은 독립되어 나가있고 점심 한 끼 먹는 남편 식생활에 맞춰야 되니 저녁 식사 챙겨 먹기가 어려웠다. 만들어진 음식을 사서 데워 먹기도 하고 빵과 우유로 대충 때울 때도 있다. 어쩌다 주말이면 아들 녀석들이 온다는 소식에 식재료를 사서 손질해 냉장고에 보관해 놓으면 뿌듯하다. 이제 사 알 것 같다. 엄마의 냉장고는 엄마 말대로 다 쓸데가 있었구나 한가득 차 있는 냉장고는 자식들의 보물창고였다는 걸 알았다.

절대 나가지 않을 것만 같던 냉장고 안의 보물들을 엄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두 꺼내어 자식들에게 주었다. 엄마의 큰 그림을 이제 겨우 볼 수 있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한 귀퉁이에 엄마가 좋아하던 홍시가 놓여 있다.

엄마가 살아 계실 때 두 녀석을 데리고 친정집에 간다고 연락하면 엄마는 한 여름에도 어김없이 냉동고에 보관해 놓은 홍시를 미리 꺼내 우리가 도착 할 때쯤이면 말랑 거리는 홍시를 손주에게 먹여 주었다. 그리고 기저귀 가방 속에 어느새 넣어 놓았는지 꽁꽁 언 홍시 몇 개가 집에 도착할 쯤 이면 잘 해동된 그 맛이 그립다. 엄마가 그렇게도 예뻐하고 사랑스러웠던 손주 녀석도 이제 어른이 된다. 나도 내 자식이 손주 손잡고 오면 엄마처럼 깊은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엄마, 나의 진리였던 엄마. 며칠 있으면 어버이날이다, 그래서 더욱더 엄마의 보물 창고가 그립고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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