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논단>
정지용의 하숙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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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논단>
정지용의 하숙집
  • 김묘순 옥천문인협회원
    세계문인협회부이사장
  • 승인 2017.05.18 1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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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의 시인 정지용(1902~?)이 1940년대 중반, 조벽암(1908~1985)이 운영하던 건설출판사에서 하숙을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조벽암의 조카인 조성호 수필가는 “정지용이 이화여전 교수 시절 건설출판사에서 하숙을 했다”며 “당시 아침에 청소하러 들어가면 정지용 하숙방에는 쓰다버린 원고지 뭉치와 비과(과자 종류) 껍질이 수북하였다”고 전했다. 이어 “당시 문인들이 건설출판사를 아지트 삼아 드나들었다. 그 중 오장환이 가장 자주 다녀갔다”고 말했다.

정지용은 1923~1929년 일본 동지사대학에 유학했다. 휘문고보 교비유학생이었던 그는 애초 약속대로 대학을 졸업하고 휘문고보 영어교사로 취임했다. 그해 그는 가족을 솔거해 옥천에서 서울 종로구 효자동으로 이사를 한다. 이후 서울 낙원동, 재동, 북아현동 등으로 가족들과 이사를 다녔다.

그런데 1944년 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군 열세로 연합군 폭격에 대비하기 위해 서울 소개령이 내려졌다. 이때 정지용은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로 가족과 함께 이사를 한다. 1945년 8·15 해방을 맞는다. 정지용은 이때 휘문고보를 사직하고 그해 10월 이화여전 문과 과장이 된다.

이 당시는 교통편이 지금처럼 여유롭지가 못했던 듯하다. 소사에서 이화여전까지 출퇴근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꽤나 되었을 것이다. 불편한 교통 상황과 시간을 절약해야하는 정지용은 서울에서의 하숙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정지용은 1946년 성북구 돈암동으로 이사를 올 때까지 하숙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정지용의 생애 또한 한국의 20세기 역사처럼 굴곡진 삶을 살았다. 일제 식민지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나하는 기대감으로 1945년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해방은 좌우익의 소용돌이 속에서 맥을 못 추고, 1950년 6·25 한국전쟁을 치른다. 이 와중에 정지용의 생사는 미궁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행여 정지용은 그에게 불어올 거센 풍랑을 예지했음인지 「나비」(󰡔문예(文藝)󰡕 8호, 1950. 6)를 발표한다. 이 「나비」는 그가 남긴 거의 마지막 무렵의 시이다.

 

‘내가 인제/ 나븨 같이/ 죽겠기로/ 나븨같이/ 날아왔다

검정 비단/ 네 옷 가에/ 앉았다가/ 窓 훤 하니/ 날라 간다‘ -나비 전문.

 

40음절의 「나비」는 죽음이 다가오는 듯한 서늘함이 안겨온다. 나비처럼 날아와 나비같이 죽겠기로, 검정 옷에 앉았다가 이승과 하직함을 유언처럼 박아 놓는다. 이 글은 지워지지 않는 판화가 되어 지금도 우리 곁을 서성인다.

정지용이 건설출판사에서 하숙을 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전기적 연구에 도움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세계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한국문학사의 사적 전개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된다.

새로 밝혀진 이 부분은 정지용의 당시 생각과 다른 문인들과의 상호관계에도 영향이 미쳤으리라고 본다.

“한민당은 더러워서 싫고 빨갱이는 무시무시해서 싫다”(민현숙·박해경, 한 가람 봄바람에-梨花100년野史󰡕)던 정지용.

그가 1930년 10월 󰡔학생󰡕 2권에 노래하던 「별똥」이 오늘밤에도 정지용 생가 마당가에 가득 떨어져 내릴 것만 같다.

정지용의 문학을 기리는 ‘지용제’ 30주년을 맞아 그의 혜음(惠音)을 받아보고 싶어지는 밤이다.

나는 「별똥」을 가만히 불러본다.

‘별똥 떨어진 곳, / 마음에 두었다 / 다음날 가보려, / 벼르다 벼르다 / 이젠 다 자랐소’

 

(이 글의 내용은 지상에서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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