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연보로 본 작품발표 현황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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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연보로 본 작품발표 현황Ⅰ
  • 김묘순 (문학평론가·(사)세계문인협회 부이사장)
  • 승인 2017.10.19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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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문학평론가·(사)세계문인협회 부이사장)

1919년은 정지용이 휘문고보 2학년 때였다. 3·1운동이 일어나 그 후유증으로 그는 가을까지 수업을 받지 못했다. 그러한 까닭에 그의 학적부를 보면 3학기 성적만 나와 있다. 그리고 1, 2학기는 공란으로 처리되어 있다.

정지용은 이 무렵 휘문고보 학내 문제로 야기된 휘문 사태의 주동이 되었다. 이때 전경석은 제적당하고 이선근과 정지용은 무기정학을 받았다. 그러나 교우들과 교직원들의 중개역할로 휘문사태가 수습되면서 정지용은 곧바로 복학되었다고 한다.

정지용은 휘문고보 재학시절인 1919년 자전적 성장소설인 「삼인」을 󰡔서광󰡕창간호에 발표하였다. 이것은 이제까지 전해지고 있는 정지용의 처녀작이다.

정지용의 본격적인 작품 발표는 1926년부터 시작되었다. 시는 주로 동경 유학생들의 기관지인 󰡔학조󰡕를 통해 「카페 프란스」, 「파충류 동물」, 「슬픈 인상화」 등을 발표하였고, 수필은 󰡔신동아󰡕에 「만추의 선물」을 발표하였다.

유학 시절인 이 시기에 정지용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은 키타하라 하큐슈라 할 수 있다. 정지용을 성숙시킨 것은 그가 운영하던 본격적인 상업 문예지󰡔근대풍경󰡕이었다.

󰡔근대풍경󰡕 창간호에 실린 하큐슈의 신인 모집 안내문은 실력 있는 작가들을 위해 문을 개방하였다. 우수한 작품은 기회 있을 때마다 소개·발표하였다. 하큐슈는 상당한 가작(佳作)이 아니면 싣지 않았다. 대신에 한 번 소개하면 그 작가를 위해서는 그 후에도 충분한 책임을 지었다. 하큐슈는 󰡔근대풍경󰡕을 하나의 등용문으로서 신뢰하되 어디까지나 높은 견식과 절조와 예술적 결백성을 가지고 시종한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러한 취지의 안내문을 보고 정지용이 투고한 작품은 수백 명의 응모자 중에 뽑혔다. 그리고 신인 작가가 아닌 기성 시인의 예로서 작품을 발표해 준 것이다. 정지용은 󰡔근대풍경󰡕에 25편의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중 23편의 작품이 1927년에 집중적으로 발표되었다.

1935년 첫 작품집 󰡔정지용 시집󰡕을 낸 이후에 시 작품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현저히 많은 산문을 발표하였다.

1941년에 󰡔백록담󰡕이라는 제2시집이 간행되었다. 이 시집에는 총 33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8편은 산문이었다. 󰡔정지용 시집󰡕의 89편에 비하면 실제로 적은 편이었다. 그것은 첫 시집 이후 제2시집을 간행해야 한다는 󰡔문장󰡕사 측의 요구가 있지 않았을까 한다. 어찌되었건 1941년은 1935년 이후 산문 발표가 주춤한 유일한 해이다.

정지용 산문이 많이 발표되었음을 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이 표는 󰡔정지용 만나러 가는 길󰡕(국학자료원, 2017, 242~253면)작품 연보를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이 연보는 작품을 책이나 잡지에 발표한 연도이다. 예를 들면, 그의 대표 시「향수」는 1923년에 썼지만 󰡔조선지광󰡕에 1927년에 발표해 1927년을 기준 연보로 삼았다.

독자들도 익히 알고 있듯이 정지용이 작품 활동을 하던 시기에는 신사참배, 창씨개명, 문화 말살 정책, 태평양 전쟁 등 국내외의 상황으로 인해 시 창작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고 엘리트였던 정지용이 전시상황에 호응하는 친일시를 쓰지 않고 버틴다는 것 또한 쉽지 않았을 것이다.

(11월 ‘정지용 논단’에 「정지용, 연보로 본 작품발표 현황Ⅱ」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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